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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호프〉와 〈오디세이〉 Hope and The Odyssey

최근 개봉작 〈호프〉와 〈오디세이〉의 일부 스포일러가 있을 수 있습니다.

서울에서 분당으로 이사오고 난 뒤에 가장 크게 바뀐 것 중 하나는 영화관 방문 빈도였다. 내가 살았던 미아에는 20분 거리에 영화관이 3곳이나 있었고, 학교에도 예술영화관이 있었다. 공강 시간에 심심할 때에도, 주말에 누워있다가 엄마랑 보고 싶은 영화가 있을 때에도, 둘이서 셋이서 때론 혼자 영화관에 가서 2시간, 3시간 동안 이야기 속에 푹 빠져있다 나오는 경험은 내가 늘 좋아하는 시간이었다. 분당에 이사오고난 후 이곳에도 cgv와 메가박스가 있었지만, cgv 아트하우스가 있는 영화관을 가려면 꽤 먼 거리를 가야했다. 독립 영화관은 가까운 거리에 아예 없었다. 그렇게 이전보다 영화관을 덜 가게 되었고, 가끔 데이트를 하거나 정말 보고 싶은 대작 영화가 있을 때가 아니면 영화 보러가는 일이 현저하게 줄어들었다.

작년에는 영화관에 좀 더 자주 가고 싶다는 생각을 했고, 한 달에 한 번은 꼭 영화관에서 영화를 보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불렛 저널에 영화관 다녀온 기록도 남겼는데, 〈더 폴 : 디렉터스 컷〉, 〈하얼빈〉, 〈미키 17〉, 〈콘클라베〉, 〈엘리오〉.. 에서 멈췄다. 12번의 영화관을 갔어야했는데 다섯번을 겨우 채웠다. 이후로는 영화관에 다녀온 것을 따로 기록하지 않았다. 볼 때 되면 보겠지, 영화관에 꼭 찾아서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영화가 별로 없기도 했다.

나는 영화를 꽤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고등학생 때는 이동진 평론가가 진행하는 ‘이동진의 꿈꾸는 다락방’이라는 라디오를 즐겨들었다. 꿈다방에서 소개해주는 영화, 이동진님이 블로그에 올려주는 영화들, 〈홀리모터스〉나 〈마스터〉,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같은 영화들을 따라 봤다. 2016년부터 시작한 김혜리의 필름클럽도 샅샅이 챙겨들었다. 〈그린 나이트〉, 〈매기스플랜〉, 〈플로우〉를 함께 봤다. 영화제를 따라다니거나, 특별히 영화에 조예 깊은 시네필은 아니지만 이야기 속에 푹 빠질 수 있는, 영화의 구성이나 플롯, 연출을 바깥에서 바라보는 게 아니라 어느새 스크린 속에 함께 들어가있는 듯한 기분을 받을 때 행복하다 느꼈다.

2017년에만 영화관에서 10번을 넘게 본 〈불한당〉도 빼먹을 수 없다. 우연히 이 영화를 보고 집에 못가고 건대 호수를 빙빙 돌았던 밤이 생각난다. 처음 본 뒤로, 온갖 영화관에서 불한당을 봤다. 한 때 세계에서 가장 큰 스크린을 가진 곳이었던 영등포 cgv 스타리움관(지금은 Screen X로 바뀌었다), 교도소 교도관들의 사각사각 발자국 소리까지 들리는 코엑스 메가박스 MX관(현재는 돌비 시네마관으로 바뀌었다), 화면이 유독 밝아서 보이지 않던 구석 장면까지 잘 보였던 부산 영화의전당 하늘연극장, 돌비 애트모스로 무장해 엄청난 사운드를 느낄 수 있었던 파주 명필름 아트센터(얼마전에 폐관했다), 당시 600여석 규모로 국내에서 제일 큰 관이었던 롯데시네마 수퍼플렉스관 등… 전국의 온갖 영화관을 다니며 불한당을 봤다. 이 영화의 감독 변성현은 차기작 킹메이커 이후로는 쭉 넷플릭스와 협업해 길복순, 굿뉴스 모두 넷플릭스에서만 공개하면서 여러 영화관에서 그의 영화를 즐길 수 있는 길이 요원해졌다. 그렇게 나의 영화관 사랑은 억지로 새해 목표에 세워야만 겨우 겨우 할당량을 채울 수 있는 위치가 되어버렸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다 만난 것이 바로 나홍진 감독의 10년만의 신작 〈호프〉였다. 내가 마지막으로 본 나홍진 감독의 영화는 〈추격자〉였고, 그마저도 시험이 끝난 여중생들이 티비에 틀어둔 스릴러 영화 시리즈 중 하나로 접했을 뿐이었다. 어항에 둥둥 떠있던 충격적인 이미지만 그 영화에 대한 인상으로 남아있을 뿐이었다. 동네에서 같이 스쿼시를 치다가 알게된 애견미용샵 주인인 언니가 갑자기 연락이 와서 같이 〈호프〉를 봐달라고 했다. 친구들이 다 봐서 본인도 보고 싶은데, 혼자 보러가기는 무섭다면서. 나도 좀 궁금하던 차라, 개봉한지 5일쯤 되었을 때 퇴근하고 동네 작은 영화관에서 〈호프〉를 봤다. 예고편 조차 보고 가지 않았기 때문에, 괴물이 나오는 나홍진 영화다. 정도 밖에 몰랐다. 그래서 앞의 50분 가량의 그 긴 시퀀스에서 엄청난 서스펜스를 느꼈고 이미 그 때 호포항 주민이 되어버렸다. 중간 지점에서 고성기 무리가 무언가를 발견했을 때, 나도 너무 놀라서 같이 온 언니한테 ‘저거 ufo아냐???’라고 속삭였다. 그러니까 스크린에서도 인물이 똑같이 말했다. “아니 이거 우주선아냐?” 이게 뭐람ㅋㅋㅋ 완전히 영화에 동화된 느낌이었다. 그렇게 영화와 함께 우다다 달리다가, 마지막 쿠얼의 함선이 추락할 때 또 옆자리 언니한테 ‘저게 뭐야???????’라고 얘기했다. 알고보니 예고편에도 있는 장면이었다는데, 난 정말 너무 깜짝놀랐다. 저게 뭐야? 이게 뭐야? 하다보니 2시간 40분이 지나있었다. 내가 지금 뭘 본거지? 〈불한당〉을 보고 호수를 빙빙 맴돌았던 9년 전 처럼, 〈호프〉 생각을 하다 밤을 샐뻔 했다.

며칠 뒤, 4DX로 〈호프〉를 한번 더 봤다. 그냥 의자에 앉자마자 실실 웃음이 나왔다. 〈호프〉는 보는 게 아니다. 타는 것이다. 4DX 의자에 앉아서 이렇게 계속 웃은 적이 있나? 영화가 웃겨서일까? 그냥 이 순수한 재미의 종합은 뭐지? 1차 때는 범석이가 60분 내내 총들고 ‘이쒸발’하고 있을 때 나도 같이 범석이가 되어, 아 이거 괴물 뭔데 있긴 있는거야? 도대체 정체가 뭐야? 하는 마음으로 봤다. 2차 4DX는 이미 바미기르가 주방 보조라는 것까지 샅샅이 알고간 뒤였기 때문에 성애의 운전에 맞춰 흔들리는 의자에 몸을 맡기고 그저 호포항에 내린 대재앙 속에 들어갔다. 여러번 의자에서 튕겨나갈 뻔해서 손잡이를 꽉잡고 봐야만 했다. (너무 재밌어..) 〈불한당〉에서도 ‘형 나 경찰이야’나오면 2부로 넘어가는 거라, 영화가 끝나간다는게 아쉬워지기 시작하는데, 〈호프〉에서도 해술이 아저씨와 보건소장의 부검씬이 나오면 아 이제 2부로 가는 구나, 생각하며 뒤로 갈 수록 아쉬워지는 2차는 또 오랜만이었다. 하여튼 너무 재밌어. 너무 너무 재밌었다.

그리고 며칠 뒤, 퇴근하고 Screen X로 〈호프〉를 또 봤다. 사실 Screen X는 4DX에서 흔들의자만 뺀거라 좀 실망스럽긴 했지만, 아 이거 세번째 봐도 재미있네 싶었다. 또 그 날 관에 사람도 많고, 처음 보는 사람들이 많아서 그 반응과 함께 하는게 흥미롭기도 했다. 중간에 잠깐 나갔다 왔는데 들어오니까 성기 무리 애들이 ‘어 이거 우주선 아냐?’라고 얘기하고 있어서 또 너무 웃겼고, 아 이 영화는 왜 이렇게 웃기지? 영화관에서 한번만 더 보고 싶다. 돌비 시네마로 한번만 더 보면 소원 성취할 것 같은데 말이지.

〈호프〉를 돌비로 한번 더 봐야지, 하고 있던 중에 크리스토퍼 놀란의 영화 〈오디세이〉가 개봉했다. 놀란의 영화는 〈인셉션〉과 〈인터스텔라〉이후로 잘 보지 못했던 터라 신작에도 큰 관심이 없었다. 그래도 오뒷세이아를 예전에 철학공부할 때 읽었었고, 동년배 친구들이 다 그렇듯 어릴 적부터 그리스로마 신화 만화를 읽으며 자라온 세대이기 때문에 어떻게 화면으로 표현해냈을지 궁금하긴 했다. 엄마가 백숙을 해준다고 해서 집에 놀러갔다가, 급 예매해서 주말 오전 〈오디세이〉를 봤다. 〈호프〉 때는 영화관이 텅텅 비어 있더니.. 〈오디세이〉는 동네에 있는 3개의 영화관 모두 꽉꽉 들어차서 자리 잡기가 어려웠다. 아이맥스관도 아니고 작은 크기의 동네 영화관이었는데도.

〈오디세이〉는 장장 3시간의 (근데 〈호프〉도 2시간 40분이라 뭐 그렇게 길게 느껴지진 않음) 영화였는데, 초반은 좀 지루하다고 생각했지만 오디세우스의 모험이 시작되고 마지막 트로이 전쟁으로 돌아가 오디세우스의 표정을 바라볼 때 나도 모르게 울컥했던 것 같다. 놀란이 오뒷세이아를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각색했구나. 그래서 처음 시작할 때 ‘명백한 마법의 시대’라는 말을 했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또 이 작품이 좋았던 이유는 페넬로페 캐릭터였다. 우아하게 앉아 베를 짜고 베일에 가려져 있는 것 같지만, 텔레마코스에게 소리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이 작품의 인물들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그것이 영화를 보는 재미이기도 하니까. 영화가 끝나고 엄마는 챗지피티에게 ‘오디세이에 나오는 신이나 요정의 이름을 다 정리해주세요’ 라고 이야기했다. 나도 옆에서 제미나이에게 키르케의 이야기나 칼립소의 이야기를 물었다. 아주 오래된 신화를 바탕으로 한 이야기는 또 이렇게 이어서 보는 재미가 있군.

이번주 금요일에는 전주 아이맥스에서 〈오디세이〉를 한 번 더 볼 예정이다. 보고나면 또 무슨 감상이 들지 궁금하기도 하고. 〈인셉션〉이 내가 최초로 영화관에서 3번 이상 본 영화였는데, 엘리엇 페이지의 출연 때문인지 아니면 오디세우스가 갇힌 칼립소의 섬이 마치 림보의 바다처럼 보여서였는지, 자꾸만 〈인셉션〉이 겹쳐 보여서 〈오디세이〉를 보러 가기 전, 〈인셉션〉을 한번 더 보고 가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영화관에 가서 영화 보기’를 굳이 목표로 삼지 않아도, 내가 즐거우면 하게 되는 구나 싶고. 그동안 영화관에서 봐야만 하는 영화들이 별로 없어서 영화관을 가지 않았나보다 생각이 들기도 하고. 다시 나의 취향을 발견하게 된 것 같아 즐겁기도 한 마음. 〈오디세이〉를 만든 크리스토퍼 놀란은 스마트폰도 이메일도 쓰지 않고(물론 이것은 아내인 영화 제작자이자 프로듀서인 엠마 토머스가 일을 다 맡아주기 때문이겠지만) 영화를 찍을 때에도 컴퓨터 그래픽 대신 실사추구를 한다는 특징이 있는데 이에 대한 인터뷰를 찾아보는 것도 흥미로웠다. 그는 본인이 기술 혐오자가 아니라고 했고, 스마트폰을 거부하는 것은 창의적 몰입 시간을 지키기 위한 극도의 실용적인 방어책이라고 말했다. 여행할 때만 기본형 폴더폰을 지참한다고 말했다.

“아이폰을 사면 끔찍하게 중독될 것입니다. 저는 그냥 창밖을 바라보며 다음 영화가 무엇이 될지 생각하는, 제가 정말 소중하게 여기는 ‘생각의 공백(Pockets of time)’들을 잃고 싶지 않을 뿐입니다.” — [더 투나잇 쇼 지미 팰런]

“AI가 인간과 인간의 창의성을 통째로 대체한다는 생각은 내게 터무니없는 소리(Nonsense)입니다. AI 모델은 결국 과거 인간이 만든 창작물을 기반으로 작동하기 때문입니다.” — [AFP 통신 / 유튜브 인터뷰]

“대중, 특히 젊은 세대들이 온라인 AI 콘텐츠를 즉각 ‘AI 슬롭(쓰레기)’이라고 부르며 상자 안에 격리하는 모습은 매우 흥미롭고 건강한 회의주의입니다.” — [더 가디언 인터뷰]

“AI는 속이 훤히 비치는 ‘유리로 만든 트로이 목마’입니다. 그 안에 무엇이 들어있는지(위험성과 의도) 모두가 뻔히 보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기술을 주는 사람들의 ‘동기’를 끊임없이 의심해야 합니다.” — [영화 《오디세이》 개봉 프로모션 인터뷰]

최근 SBS와의 인터뷰에서도 AI 시대가 올 수록 결국 영화 제작의 본질이자 가장 중요한 것은 인간의 창의성이라고 답했다고 한다. 그치 제일 중요한 건 인간의 창의성이자 취향이지. 그렇게 생각하니, 내가 그동안 이동진과 김혜리 기자, KU시네마테크와 불한당과 함께 만들어온 나만의 취향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다시 한번 깨닫게 되었구. 더 많은 창작과 창의성을 만나고 싶다는 생각도 든다. 재밌다 재밌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