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으로 안 되는 것이 있다. 돈으로 안 되는 것이 있다.

월요일 새벽, 외할머니가 돌아가셨다. 할머니가 세상을 떠나신 그 시간에 서재에서 충전중이던 내 에어팟에선 삐삐- 소리가 났다. 새벽에 잠에서 깨어 에어팟 충전선을 빼고 시간을 보니 5시였다. 할머니는 4시 50분에 영면하셨으니, 우리 집 분당까지 들러서 인사를 하고 가신 건가. 알 수 없었다. 할머니의 유언은 장례식은 서울에서 치르지 말고 정읍에서 치르라는 것이었다. 쌍치의 동네 사람들이 더 쉽게 찾아왔으면 좋겠다고 하시면서. 할머니는 술도 잘 드시고, 노래도 잘 불렀다. 동네에서 인기쟁이였다. 평범했던 어느 날에도, 집 뒤에 있는 경로당에서 술을 한잔 하시다가, 집으로 넘어오는 담벼락에서 넘어지셨고, 그 뒤로 걸을 수 없게 되셨다. 그 후에 할아버지가 폐암 선고를 받으셨고, 가족들은 할아버지의 항암치료와 케어를 위해 할아버지를 서울로 모셨다. 할머니는 쌍치 집에서, 잘 걷지 못하게된 채로 혼자 남아계셨다. 할아버지는 암세포를 오래 견디시진 못하셨다. 투병 생활을 1년쯤 하시다 돌아가셨다. 정말 사이가 좋았던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다시 만나지도 못한채 영영 이별했다.
그 뒤로도 할머니의 삶은 10년동안 계속되었다. 슬프게도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얼마 되지 않아 기주삼촌도 폐암 선고를 받았다. 삼촌은 병마와 싸우며 할머니가 혼자 계신 쌍치집으로 내려와 살았다. 삼촌은 6년을 더 살았다. 삼촌이 세상을 떠나던 날, 할머니가 혼자 있었던 쌍치집에는 벌 한마리가 날아들었다 했다. 할머니는 날아든 벌을 보며 우리 기주가 갔구나, 생각했다고 했다. 할머니는 그 뒤로 계속 왜 할아버지가 본인을 데려가지 않냐는 이야기를 하시곤 했다. 그러면서도, 기주삼촌이 애지중지 키우던 길고양이에게 밥을 챙겨주셨다. 그 길고양이가 아닌 다른 고양이들은 돌을 던지고 소리를 지르며 내쫓으셨다. 미스터트롯에서 최애가 누구인지 희재가 왜 귀엽고 예쁜지에 대해 일장연설을 하시곤 했다. 편치않은 다리로도 마당에 예쁜 꽃을 가꾸셨고, 맛있는 반찬을 해서 꼭 챙겨주시곤 했다. 새해에는 꼭 ‘민석이 새해 복 마니 바다라’라는 글씨를 쓴 봉투에 용돈을 담아서 세뱃돈을 주셨다. 나는 그 봉투를 잃어버리고 말았고, 평생 슬플 것이다.
할머니의 마지막 3년은, 평생 살았던 쌍치의 집이 아니라 서울의 요양병원에서 보내셔야 했다. 할머니의 건강이 들쑥날쑥 했고, 가족들은 서울에서 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모와 삼촌이 매일 매일 번갈아가며 할머니가 계신 병원에 갔다. 서울에서 4시간이 걸리는 쌍치에 계셨다면 힘든 일이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할머니가 요양병원이 아니라 집에 계셨으면 좋겠다고 늘 생각했다. 어른들의 결정을 바꿀 수 없다는 걸 이미 할아버지의 항암치료 때 겪었기에 어떤 액션도 하지 못했지만.
엄마도 나와 같은 마음이었다. 엄마는 할머니에게 벚꽃이 피는 4월에, 벚꽃이 예쁘게 피는 쌍치집에 꼭 가자고 했다고 했다. 하지만 할머니는 3월부터 급격히 건강이 안좋아지셨고 중환자실에 계셔야만 했다. 연명치료에 대한 가족들의 의견이 분분했지만, 가족들은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했다. 그렇게 5월 18일,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10년전 그날의 바로 다음날, 할머니도 세상을 떠나셨다.
상을 치르는 마지막 날, 정읍 장례식장에서 남원에 있는 화장터에 갔다. 화장터에서 또 쌍치에 있는 장지로 고개 고개를 넘어 갔다. 비가 많이 내렸다. 할머니의 영정과 유골함을 모시고 쌍치집을 한바퀴 휘 돌았다. 벚꽃이 피면 돌아오자던 엄마와의 약속은 지켜지지 못했고, 할머니가 다시 쌍치로 돌아온 것이 오늘일 수 밖에 없다는 게 너무 슬펐다. 동네 앞 열녀문에서 노제를 지냈다. 노제에는 할머니와 동네에서 같이 노래도 부르고 술도 마시고 음식도 나눠먹던 동네 어른들이 오셨다. 가족들이 아니라 할머니의 동네 친구들이 할머니에게 마지막으로 술을 올리는 시간이었다. 영정과 유골함으로 돌아온 할머니를 마주하고 동네 어르신들은 서서 한참을 눈물을 흘리셨다. 그 모습에 가족들도 함께 울었다. 우리 할머니도 함께 우는 것처럼 비가 세차게 내렸다.
노제를 마친 후 장지에 올랐다. 할아버지와 삼촌이 모셔져 있는 선산에 올라가는데 신발이 점점 진흙에 빠져 엉망이 되어갔다. 좁은 산 중턱에 20여명의 가족들과 친지들이 옹기종기 모여 평토제를 지냈다. 할머니의 유골함을 묻고, 그 위에 손자 손녀를 포함한 모든 가족들이 흙을 손으로 퍼서 조금씩 담았다. 나는 하늘을 보고 할머니에게 손을 힘껏 흔들어 인사를 했다. 할머니, 진짜 잘가. 할머니, 할아버지 만나서 행복하게 계셔! 기주 삼촌도 같이 있으면 셋이 심심하진 않겠다. 그 생각을 했다.
함께 선산 앞까지 온 작은 할아버지는 하얀 신발에 진흙이 묻는다며, 본인이 몇십억을 들여서 400평 땅에 넓게 만들어둔 납골당을 두고 왜 여기다 모시냐며 툴툴 대시다 결국 따라 올라오지 않았다. 할머니가 넘어지신 그 담벼락 너머에 있던 경로당도, 할머니가 살았던 쌍치집도, 노제를 지낸 그 열녀문도 모두 작은 할아버지의 돈으로 지은 것이었다. 작은 할아버지는 20대 때 무역 사업으로 성공해, 회사를 차리고, 부동산 투자까지 모두 성공하면서 평생 혼자 다 쓰지도 못할 부를 모은 엄청나게 큰 부자였다.
상을 모두 치르고 가족들은 쌍치집으로 다시 내려와 점심 도시락을 먹고, 상복을 정리하고, 각자 차를 타고 서울로 부천으로 가는 먼 길을 떠났다. 그 길에 작은 할아버지는 꼭, 본인이 만들어둔 납골당을 구경하고 가라고 신신당부를 했다. 들러보니 정말 거대한 곳이었다. 엄청나게 많은 화강암을 쌓아뒀고, 대궐 같은 묘지를 만들어뒀다. 예전에도 넓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넓은 곳도 리모델링을 할 수 있구나.. 한편으로는 대단하다고 느껴졌다. 이건 돈만 들인다고 되는 건 아니긴 할텐데, 어떠한 집념이 작은 할아버지가 이런 일을 하게 만드는 것인지 궁금하기도 했다.
가족들은 우산이 없다며 차에서 내리지 않았고, 나만 대표로 차에서 내려 작은 할아버지에게 비하인드를 들으며 라운딩을 했다. 할아버지는 이렇게 넓고 좋은 데를 비싼 돈 들여서 만들어 놨는데, 왜 굳이 그 좁은 산에 셋이나 옹기종기 모여 있냐고 투덜대셨다. 그 이유를 모르시는 게 아닐텐데. 내가 무슨 말을 한다고 86세 부자 양반의 마음을 바꿀 수 있는 것도, 86세 부자 할아버지에게 깨달음을 줄 수 있는 것도 아닐테지만, 그냥 하고 싶은 말이 있었다. 그래서 말했다. “할아버지, 사람마다 가치관이 다 다르니까요. 돈으로 다 되는 건 아니고, 누군가에겐 비싼 돈보다 더 중요한 게 있을 수 있죠. 가족들끼리 옹기종기 모여있는 게 더 행복할 수도 있어요.” 하지만 평생을 돈이 가장 중요했고, 아마도 돈으로 많은 것을 해결해왔을 할아버지에게는 빗소리에 묻혀지나간 말이 되었을 것이다.
그치만 이 말을 할아버지에게 한 건, 나에게도 큰 울림이기도 했다. 그래, 돈보다 중요한 게 있지. 돈이 가장 중요한 건 아니지. 매일을 할머니를 보러 병원에 가던 이모와 삼촌의 마음, 아들의 결혼식을 보고 자전거를 타고 병마와 싸우던 삼촌의 의지, 늘 아빠와 싸우지 말고 잘 지내라고 전화로 신신당부하시던 할머니의 사랑. 그런 것들을 돈과 바꿀 수 있을까? 돈이 아무리 수억, 수천억이 있다고 해도 가지지 못할 그 사랑같은 것들.
그 사랑은 포르쉐 자동차와도, 7000만원짜리 벤츠와도, 잠실의 아파트로도 바꿀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그 물질이 남긴 공허함이 둥둥 떠다니는 것 처럼 보였다. 할머니가 세상을 떠나면서 나에게 아주 중요한 것을 가르쳐주고 가신 것 같다. 오늘까지만 조금만 더 슬퍼하고, 할머니가 남겨준 이 소중한 깨달음을 안고 또 내일을, 하루 하루를 감사하며 사랑으로 살아야지. 할머니 그만 우시고 이제 할아버지랑 행복하게 보내셔요. 다음에 또 만나요. 쌍치에도 엄마 모시고 자주 갈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