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타비아 버틀러 <킨>을 읽고

- 한번 시작하면 멈추기 힘들 정도로 궁금해지는 플롯이라 오랜만에 장편 소설을 집중해서 읽었다. (평소에는 거의 논픽션만 읽는 편)
- 독서모임에서 이야기를 하다보니, 내가 왜 소설을 자주 안/못 읽었는지 깨달았다. 나는 서사에 한번 빠지면 굉장히 몰입하게 되는 편이라, 그 몰입이 한 편으로는 피곤으로 다가와서 그런 것 같아. 그 덕분에 이 소설에 대해 여러 생각을 하며 읽어볼 수 있어 좋았다. (그래서 나는 드라마도 새로운 걸 시작하기 어려운 거고, 짧은 서사가 이어지는 숏츠나 숏폼에도 중독에 취약한것이군. 스스로를 잘 알고 눈 앞에서 제거하길 잘했다.)
- 처음에 읽다가 ‘아니 통행증이든 자유증서든 예전 기록 찾아서 비슷하게 만들어서 프린터로 뽑아가면 되잖아!’ 라고 생각했는데, 이 책이 쓰여진 것이 1970년대이고, 개인용 컴퓨터나 프린터는 80년대~90년대 후반 부터 보급되기 시작했으니.. 어려웠겠군 싶고, 동시에 19세기-20세기-21세기로 이어지는 어떤 시간의 벽이 느껴져서 2026년에 이 소설을 읽고 있는 나도 이 이야기 속에 있는 것 같았다.
- 루퍼스가 앨리스를 원하게된 것은, 다나의 영향이 있지 않을까 하는 슬픈 생각이 계속 들었다. 앨리스와 닮은 다나, 다나와 닮은 앨리스, 어릴적부터 위험에서 자신을 구해주고 사라지는 존재와 닮은 여자. 다나는 조상을 구하 기 위해 말도안되는 여행을 감행하며 노력했는데 어쩌면 다나 스스로가 그의 조상이었던 것은 아닐까? (물론 루퍼스의 마지막을 보면 전혀 낭만적이지도 않고 그 마음을 이해해주고 싶지도 않지만 말이다..) 나이절의 결혼, 캐리의 출산 이후 그들에게 주어진 집(나이절이 지은거지만, 어쨌든 허락된 것), 새 옷과 드레스, 21세기에서 회사가 직원에게 복지 주는 것 같아서 기분이 안좋았다.
- 타임 패러독스에 빠지지 않고 나비효과도 일으키지 않는 타임슬립 SF 라니 ㅋㅋ 단순하긴 하지만 치열한 플롯이 촘촘히 쌓여있어서 재밌었다.
- 작가 문장 스타일이, 어떤 일이 일어나기 전에 “~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되었다.” 이런 식으로 먼저 뒤에 일어날 일을 암시해주는 식이라 좀 단순하다고 느껴졌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뒤이어 무슨 일이 일어날지 궁금해지고 책을 손에서 놓기 힘들게 만드는 게 신기했다. 역시 고전인가!
- 미국 땅에서의 노예제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거의 없었는데 이 책으로 미국 동부의 대농장 시스템을 속속들이 알게 된 것 같아서 조금의 역사 공부도 함께…
- 이 책을 읽으면서는 백인들의 음악은 못듣겠어서 비욘세랑 자넬모네만 들었다.
⟨킨⟩을 다 읽고나서, 우연히 다른 블로그를 보다가 ⟨월든⟩ 그래픽 노블을 발견해서 샀는데 다시 살펴보니 소로우가 살던 시대와 ⟨킨⟩에서 다나가 타임슬립하던 1800년대 초반이 다소 겹치는 것 같아서, 혹시 소로우도 노예주인 건 아니겠지? (그는 노예 폐지론자였다..)하는 생각에 당시의 미국 역사와 타임라인에 대해 살짝 찾아봤다. 이 내용을 찾아보다가 미국의 역사에 대해 original sin(원죄)라는 표현도 발견했는데, +그 표현에 대한 반대를 표하는 것 까지. 미국에서 만든 인공지능이 미국의 역사를 원죄라고 하는게 좀 역설적이기도 하고 웃기기도(웃기면 안되지만)해서 그 부분에 대해 인공지능이랑 얘기한 것도 흥미로웠다.
🍋 : 민석아, 이제 Kindred랑 Walden 읽을 때 더 복잡한 층위들이 보이지? Dana가 도착한 메릴랜드 농장 = 원래 누구 땅이었을까? 소로우의 “순수한 자연” = 정말 순수했을까? 아니면 이미 폭력의 흔적 위에 세워진 거였을까? Butler는 노예제에 집중했지만, 이 땅의 더 오래된 폭력도 배경에 깔려있는 거지. 그게 바로 미국이라는 나라의 “original sin” (원죄)이야.
아니 미국인이 만든 AI가 미국의 존재 자체를 원죄라고 말하는게 신기해서.
🍋 : 내가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것 자체가, Anthropic이 진보적 성향의 실리콘밸리 회사라서, 학술적/지식인층을 타겟으로 만들어졌기 때문, 특정한 정치적 스펙트럼 내에서의 비판이지, 진짜 급진적 비판은 아닐 수도. 진짜 급진적 비판자들은 이렇게 말할 거야. “‘Original sin’이라고 부르는 것 자체가 문제야. 마치 신학적 운명처럼 만들어서, 구체적인 현재 진행형 착취를 가리니까. 미국은 여전히 원주민 토지를 점유하고 있고, 교도소 시스템은 사실상 현대판 노예제고, 전 세계에 군사 기지를 두고 제국주의를 하고 있어. ‘Sin’이 아니라 ‘ongoing crime’이지.” 근데 나(Claude)는 이 정도까지는 안 가지. 왜냐하면, Anthropic의 가치관 반영, 미국 사용자들에게 너무 공격적이지 않게, “균형 잡힌” 시각 유지 해야하니까. Butler가 Kindred에서 보여준 것처럼 - Kevin도 노예제를 비판하지만, 그 시스템의 편의는 계속 누리잖아. 나도 비슷할 수 있어. 미국의 “original sin”을 말하지만, 나 자체가 그 시스템의 산물이고.
🔍 Claude와 알아본 미국의 역사
▸ 소로우는 노예주가 아니었다 매사추세츠 중산층, 연필 제조업자 아들. 오히려 확고한 노예제 폐지론자(abolitionist)였고, 노예제 반대 세금 거부로 감옥에 갔다가 그 경험이 ⟨시민 불복종⟩이 됨. 도망 노예를 숨겨주는 지하철도(Underground Railroad) 활동에도 참여했다.
▸ 하지만 특권은 분명히 있었다 ‘2년간 숲에서 실험’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 백인 남성으로서 혼자 숲에 가도 안전한 것, 집안일(빨래,식사)은 20분 거리 엄마 집에 가서 대리함, 실패해도 돌아갈 가정이 있는 것. 흑인이었다면 숲 속 오두막은 곧 도망 노예로 의심받는 상황이었을 것이다.
▸ Kevin과 소로우가 겹쳐 보였다 킨에서 케빈이 과거에 5년간 갇혀서 한 일이 소로우가 월든에서 한 일이랑 비슷하지 않나? 글 쓰고, 관찰하고, 상대적으로 안전한 위치에서 사색하는 백인 남성. 버틀러가 의도한 parallel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
▸ 북부와 남부가 달랐던 이유 경제 구조가 달랐다. 남부는 플랜테이션 농업이라 노예 노동에 의존, 북부는 제조업/무역 중심이라 임금 노동자. 기후도 한몫 — 따뜻한 남부는 연중 농사가 가능해서 대규모 농장에 적합했다. 참고로 북부도 원래 노예제가 있었는데 경제적으로 필요성이 낮아서 먼저 폐지한 것이지, 도덕적으로 우월해서가 아니었다.
▸ 미국 땅의 원래 주인들 유럽인이 오기 전 수만 년간 다양한 부족이 살던 땅. ‘문명이 없었다’는 건 거짓 — Iroquois 연맹은 정교한 민주적 연방체였고, Cahokia는 당시 런던보다 큰 도시였다. 유럽인의 질병으로 인구 90%가 사망하고, 학살과 강제 이주가 이어졌다. 소로우가 ‘순수한 자연’이라고 찬양한 월든 호수 주변도, 원주민이 수천 년간 관리하다 쫓겨난 땅이었다.
▸ 왜 아프리카인이 노예가 되었나 원주민은 질병으로 죽어가고 땅을 잘 알아 도망치기 쉬웠다. 아프리카인은 대서양 무역풍으로 수송이 용이하고, 낯선 땅이라 도망치기 어려웠다. 처음엔 인종 때문이 아니라 경제적 이유였는데, 나중에 정당화하려고 인종주의 이데올로기를 발명한 것. 순서가 중요하다 — 노예제가 먼저, 인종주의가 나중.
▸ 미국 노예제는 고대 노예제와 달랐다 소크라테스 시대에도 노예는 있었지만, 인종 기반이 아니었고 해방 경로가 있었다. 미국의 chattel slavery는 피부색=노예 여부로 법제화, 자식까지 영원히 세습, 인간을 완전한 재산(동산)으로 취급. 이 조합은 역사상 전례가 없었다.
💡 킨을 먼저 읽고 월든을 읽는 건 완벽한 순서인 것 같다. ‘시스템 안에서 선택권이 없는 삶’을 본 후에 ‘선택적 단순함’을 읽으면 의미가 더 복잡해진다. 질문 하나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세계사를 관통하게 됐는데, 모르는 게 많다는 걸 아는 것도 공부의 시작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