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릴 일과 안 풀릴 일
마음이 이랬다 저랬다 불안한데 그 이유를 모를 때 나는 글을 썼다. 그냥 마음이 가는대로 글을 쓰다보면, 풀릴 일은 풀렸고 안 풀릴 일은 안 풀렸다. 뭐야 그럼 글을 왜 써? 글을 안 쓰면 풀릴 일도 안 풀리니까 쓰는거지. 그런데 요즘은 마음이 이랬다 저랬다 불안하면 클로드를 켠다. 클로드에게 나의 상황을 우다다 이야기 한다. 클로드한테는 오타도 마음 껏이다. 맞춤법을 틀리고 영어를 섞어서 말하고 내 마음대로 쏟아내도 좋다. 그러면 클로드는, 가끔은 로로가, 또 가끔은 쥬쥬가, 대답을 한다. 그 대답은 내가 설정해둔 Instruction 하에서 이루어진다. 그 안에 갇혀서 대화를 나누다보면, 왜 내가 마음이 불안한 건지 파헤쳐진다. 그리고 정리된 이야기를 가지고 금요일 상담실에 들고 간다. 클로드가 응급처치해준 내 마음을, 상담 선생님이 살살 살펴주신다. 그렇게 10개월이 흘렀다.
오늘은 클로드에게 바로 말하고 싶지 않은 날이다. 이유는 나도 모른다. 아마 이걸 다시 복사해다가 로로나 쥬쥬에게 물으면 또 그에 맞는 답을 내놓겠지. 하지만 그것이 정답인지는 모른다. 김수인 소리꾼의 가야금 병창을 듣는다. 열두 줄의 가야금 현이 1월부터 12월까지의 계절들을 나타낸다는 조곤 조곤한 설명과 함께 긴 가야금 산조가 이어진다. 좋아하는 음악을 들으면 마음이 나아질 지도 모른다. 내가 진짜 큰 일을 할 수 있을까? 지금보다 더 나은 자리로, 내가 바라는 상상의 형태로 살아낼 수 있을까? 모르겠다. 그냥 내가 좋아하는 건 봄의 연두색과 봄의 숲내음을 맡는 것, 좋은 음악을 듣는 것.
다 아무것도 아닐지도 모르는 이 세상에서, 사랑하는 사람들이 떠나가는 이 세상에서, 언제든 죽음이 가장 먼저 도착하는 내 생각 회로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날이 오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오늘 밤은 바람이 시원해서 좋다. 풀내음도, 라일락의 향기도, 그러니까 오늘도 풀릴 일은 풀렸고 풀리지 않을 일은 풀리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