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자리의 모양을 찾아서] #9. 넥스트의 넥스트가 뭐에요?
관성과 이니셔티브 사이에서 고민하던 나는 근속 5주년을 맞은 후에도 고민을 거듭했다. 그 즈음에 이직을 하기 위해 여러 회사에 서류를 내고 면접을 보기도 했는데, 완전히 내 자리라고 생각하는 곳을 만나기는 쉽지 않았다. 그 사이 회사는 안팎으로 시끄러웠다. 노조가 결정되고, 오랜 시간 직원들에게 신뢰를 쌓아온 창업주이자 대표는 공식 석상에서 모습을 감춘지 오래였다. 큰 변화는 많지 않았던 우리 조직에도 그 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했다. 권고사직, 희망퇴직 같은 말들이 들려왔고 매일 매일 소문만 무성한 회사를 다니는 것이 점점 힘들어지던 차였다.
그리고 나서 있었던 일은 이제 막 1년이 넘은 일들이다. 지금 돌아보기에는 아직 이른 타이밍일지도 모른다. 그 당시 퇴사 결정을 하고 첫 이직을 결정하면서 여러 대화를 했고, 그 과정을 글로도 남겨두었지만 사실 아직도 그 글을 다시 열어볼 용기가 잘 나지 않는다. 그때는 몰랐지만 지금 가장 중요하다는 생각이 드는 하나의 순간을 떠올려보자면, 이매에 있는 정원이 멋진 카페에서 유니콘 스타트업의 엔지니어링 매니저 K님과의 커피챗이 떠오른다.
“그럼 넥스트는 정해졌고, 넥스트의 그 다음 넥스트는 어떻게 생각하고 있어요? 앞으로 로드맵이 어떻게 돼요?"
그 말에 나는 제대로된 답을 하지 못했다. 넥스트도 겨우 정했는데, 넥스트의 넥스트까지 벌써 고민해야 한다고요?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지만, 겉으로는 ‘글쎄요 하하..’ 라고 말할 뿐이었다. 사실 나는 그때 로드맵이 없었다. 이 회사를 벗어나서 저 회사로 가는 것에만 몰두해 있었다. 우연히 온 기회를 놓치지 않고 잘 붙잡아야 한다고.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는 너무 많이 재고 따지지 말고, 흘러가는 대로 맡겨보자 생각하고 있었다.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글쎄요.. 일단은 흘러가는 대로 살고 싶은데요.”
한시간 반 내내 인자한 미소로 대화하시던 K님이 표정을 바꾸며 단호한 얼굴로 대답했다.
“그러면 안돼죠.”
“왜..요..?”
K님은 넥스트의 넥스트를 정해두어야하는 이유에 대해 얘기하셨다. 그것을 고민하고,나의 커리어 로드맵을 어떻게 가져갈지 생각해둔 후에 넥스트로 가야, ‘그 넥스트’에서 잘 해낼 수 있다고 말씀하셨다. 정말 중요한 이야기였다.
하지만 그때의 나는 그 이야기를 소화할 수 있는 단계가 아니었다. 그리고 ‘넥스트의 넥스트’를 고민하지 않은 채 떠났던 ‘넥스트’에서는 예상과 다른 시간들이 펼쳐졌다. 사실 예상했던 것이 없었으니 예상과 다른 시간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적절한지도 모르겠다. 짧았던 그 여름을 요약하자면, 강남에는 사람이 너무 많았고, 그해 6월부터 8월은 너무 더웠다. 회사 건물 계단 구석에 서서 앞으로도 뒤로도 위로도 아래로도 가지 못했다. 점심 시간에는 밥도 먹지 않고 신논현 거리를 서성였다. 어깨가 아파서 더이상 공을 던질 수 없는 투수 신세가 되었다. 그리고 공을 더 던질 수 없다고, 이제 쉬어야겠다고 말했다가 아니? 너는 그 상황에서 마운드에서 그렇게 말하면 안되는거야. 더 할 수 있다고, 더 던질 수 있다고, 믿어달라고 말해야하는거야. 참 이상하네.
그 시간을 회복할 수 있게 해준 건 원주에서 보낸 가을방학 덕분이었다. 어쩌다 보니 ‘넥스트의 넥스트’, 아니 사실 이게 나의 진짜 ‘넥스트’였는지도 모르겠지만. 그 넥스트로 가기 위한 준비를 하는 시간이었다. 안락하고 평화로운 상은이네 집에서 오늘오후 고양이들과 함께 2주를 보냈다. 상은이는 내가 고민하거나 걱정하려고 하면 게이밍 컴퓨터 앞에 나를 앉혔다. 메이플 스토리해! 레벨업 하고 와! 상은이와 매일 <흑백요리사>를 보고, 고양이들과 놀고, 동네 산책을 했다. 동네 도서관에 다녀오고, 집에서 맛있는 요리를 해먹고, 뒹굴거리며 책을 읽었다. 그렇게 회복의 시간이 끝났을 무렵, 진짜 나의 ‘넥스트’가 결정되었다.
[🍪쿠키] 첫 이직 무렵 했던 대화 중, K님과의 대화 말고 생각나는 게 하나 더 있다. 청주에 있는 해주님 부모님 댁에 가서 해주님 어머님과 나누었던 대화였다. 그때 나는 5년 반 다닌 회사를 곧 퇴사하는 마음에 싱숭생숭하여 그 마음을 털어 놓았다. 괜히 지금 회사도 괜찮은 것 같고, 너무 편하고 익숙하고 좋은데 나가는게 맞나 싶다고. 이미 팀장님한테 퇴사를 말하고, 처우 협의도 끝내고, 사직원 수리까지 다 해놓고도 이게 맞나 싶다는 생각이 든다고 얘기했다. 어머님은 지금 하는 일을 앞으로도 계속하고 싶은 거면, 옮겨보는 게 좋을 것 같다고 하셨다. 다양한 곳을 경험하면서 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을테니까. 그러면서 이런 말을 하셨다.
"왜 미용실에 머리 자르러 가면, 지금 머리가 제일 괜찮아 보이잖아. 지금 마음도 그런 거 아닐까?"
찰떡같은 비유였다. 그리고 이런 말을 덧붙이셨다.
"근데 나는, 뭐 다른 컴플레인은 몰라도. 머리 마음에 안들게 자른 건 별로 뭐라고 안해."
왜요? 라고 물으니, 해주님과 어머님이 동시에 대답했다.
"다시 자라니까."
그치 다시 자라지. 어쩌면 나의 퇴사나 이직과는 전혀 관련없는 것 같았던 머리카락 이야기에, 그 순간만큼은 첫 퇴사로 두려운 마음이 산뜻하게 날아간 듯 했다. 그리고 1년이 지난 지금, 어쩌다보니 두 번의 퇴사를 하고나서 ‘넥스트의 넥스트’ 아니 그냥 ‘넥스트’로 온 지금 그 말이 더욱 따뜻하게 다가온다.
“다시 자라니까”
나의 상처받은 마음에 새살이 돋는 것도, 무너져내린 커리어패스를 다시 주워담아서 나의 미래를 닦아가는 것도, 시간이 지나면 다시 자라나는 머리칼처럼 계속 다시 자라나고 있다. 청주에서 아침 산책길에 맡은 딸기의 향이 달큰하게 다시 떠오르는 기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