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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자리의 모양을 찾아서] #7. 내가 찾은 나만의 울타리

그렇게 새로운 챕터가 시작되었다. 2019년 1월, 엔씨소프트 19기 공채 신입사원으로 입사한 나는 처음 3주 동안 판교에서 가장 커다란 엔씨 사옥 건물에서 신입사원 교육을 받았다. 말이 교육이지, 3주 내내 입사 동기들과 하하호호 떠들고, 매일 술을 마시고 노는 시간이었다. 그렇게 3주의 시간을 보내고 현업에 배치된 첫 날 무슨 일을 하게 될지 두근거리는 질문을 안고 사무실에 출근했다.

면접을 봤던 팀으로 배치되지 않아 의아하긴 했지만, 크게는 같은 조직이었으므로 내가 취업 준비생 때 상상한 일을 하게 되지 않을까 싶었다. 같은 조직에 배치된 신입사원은 나 포함 4명이었고, 나를 제외한 3명은 모두 프로그래머였다. 실장님은 신입사원 4명에게 조직의 구조나 앞으로 나아갈 방향 등을 들려주셨다. 대부분의 말을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열심히 노트에 받아적었다. 열심히 필기하는 사람은 나 뿐이었다. 다들 프로그래머라 쉽게 이해가 되어서 안 적는건가? 나도 컴퓨터공학을 전공하긴 했지만, 철학을 복수전공 하며 원전공과는 점점 멀어졌고, 결국 첫 커리어를 서비스 기획자로 시작했기에 조금 위축되어 있었다.

대부분의 이야기를 알아듣지 못한 미팅이 끝나고, 실장님이 나를 따로 부르셨다. 1:1 면담이었다. 긴장되는 마음으로 자리에 앉았다. 무슨 생각을 가지고 이 곳에 입사하게 되었는지 물어보셨다. 나는 면접 때 했던 이야기를 술술 풀어놨다. '무언가를 만들고 싶다'는 마음으로 컴퓨터공학과에 진학했지만, '만드는 행위' 그 자체보다 '무엇을 만들까'를 고민하는 게 더 즐거워서 철학을 공부하게 되었고, 서비스 기획자를 지원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했다. 이에 실장님은 내가 개발을 잘 아는 서비스 기획자가 되어야 한다고 말하셨다. 회사에는 이런 역할을 했던 기획자가 없어서 붙잡고 가르쳐줄 사람은 없지만, 도와줄 사람은 많으니 개발자든 PM이든 대화를 많이 하고 스스로 개발지식을 익혀서 스스로 성장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면담이 끝난 후, 자리로 돌아와 이 대화를 기록하며 오기가 생겼다. 사수도 매뉴얼도 없다는 것에 불안했지만, 실장님 말씀대로 여러 선배들에게 물으며 잘 기록해두면 나만의 성장을 만들어낼 수 있을 거란 생각에 조금 설레기도 했다.

매일같이 새롭게 배우는 개념과 용어가 쏟아졌다. 아직 제대로 할 줄 아는게 아무것도 없었는데, 당장 회의에 들어가서 기획서를 만들어내야 했다. 지금와서 생각해보면 아직 대학교도 졸업하지 않은 신입사원에게 그렇게 큰 결과물을 기대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당시의 나는 진지하고 절박했다. 꼭 잘 해내고 싶었고, 나의 자리를 단단하게 만들어내고 싶었다.

그래서 사내 위키 문서를 죄다 뒤져서 전후 상황을 파악해보려고 애쓰고, 그렇게 얻은 지식 조각을 들고 개발자 선배들을 찾아가 마구 질문을 했다. 귀찮으셨을만도 한데, 감사하게도 매번 친절하게 설명해주셨다. 설명해주신 것을 열심히 메모한 뒤에 다시 업무일지에 옮겨뒀다. 이렇게 하고나니 입사 후 일주일 뒤에는 내가 무슨 업무를 담당해야 하는지, 지금 무슨 상황인지, 무슨 관계 속에 놓여있는 것인지 큰 그림을 파악할 수 있었다.

나의 목표는 맡은 일을 엄청나게 잘해내는 것이 아니었다. 그저 하루 하루 조금씩 부딪히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부딪힌 경험을 모두 업무일지에 적었다.

그렇게 매일 업무일지를 쓰며 하루 하루 성장하는 것을 느꼈다. 입사 후 3년 동안은 매일 일 고민을 했고, 그것이 즐거웠다. 조직에서는 신입 사원임에도 인정을 받았고, 그만큼 질투도 받았다. 하지만 예의 그 성격대로 함께 술도 마시고 빈틈을 보이기도 하면서 조금씩 회사 안의 내 자리를 찾아갔다.

가족에서 느끼지 못했던 든든한 울타리 같은 것을 회사에서 느끼고 있다고 생각했다. 이 울타리는 내가 노력해서 얻은 나의 울타리였다. 동료들은 나를 신뢰했고, 까마득히 연차가 낮은 기획자인 나의 말을 중요하게 받아들여줬다. 게다가 회사에서 맨땅에 부딪히느라 쓰게 된 업무 일지는 외부 플랫폼에 기고했다가 대박이 나서 어떤 달에는 월급만큼의 원고료가 들어오기도 하고, 외부 강의 요청이 쏟아지기도 했다. 2020년부터 2022년까지 세계를 덮친 코로나 팬데믹 상황에서도 내가 있는 곳은 오히려 더 승승장구했다. 회사 주가는 100만원을 상회했고, 연봉이 30% 상승했고, 인센티브도 엄청났다.

이 모든 것이 자연스럽고 영원할 거라고 생각했다. 아무도 이 울타리를 부셔선 안됐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 안타까울 뿐이다. 회사는 울타리가 아닌데, 그저 나는 계약관계로 맺은 노동자일 뿐인데, 회사를 내가 찾은 나의 첫 소속, 내가 드디어 소속감을 느낄 수 있는 나의 둥지라고 생각했다. 아주 큰 잘못된 생각이었다. 그리고 그 생각이 그 이후 힘든 시간들을 자연스럽게 불러오게 될 줄은 그때는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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