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minseok.com

[내 자리의 모양을 찾아서] #0. 꿈이 곧 직업이고, 직업이 곧 일일까?

"넌 꿈이 뭐야?"

이 질문을 받을 때마다 머릿속이 하얘졌다. 초등학교 때는 쉬웠다. 장래희망란에 '교사'나 '한의사' 같은 부모님이 좋아할 만한 직업을 적어 넣으면 그만이었으니까. 그런데 언제부턴가 이 질문이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꿈이 곧 직업인 건가? 직업이 곧 내가 하는 일인 건가?

꿈 = 직업 = 일

중학교에 올라가서 책을 미친 듯이 읽기 시작했다. 그때부터였을까, 비로소 내 머리로 뭔가 생각이란 걸 하게 되었다. 고등학교 1학년 때는 중앙일보를 열심히 읽었는데, 신문에는 온통 '소프트웨어'나 'IT' 이야기뿐이었다. 자연스럽게 컴퓨터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장래희망란에는 '컴퓨터 프로그래머'나 'IT관련업'이라고 적기 시작했다. 그때는 꿈도 직업도 일도 다 같은 말인 줄 알았다. 컴퓨터공학과에 가서 삼성에 취업하는 것. 그게 나의 꿈이자 직업이자 일이었다.

꿈 = 일, 일 != 직업

그런데 고3 봄, 중앙일보 학과탐방에서 서강대 아트&테크놀로지학과를 만났다. 교수님이 보여준 '월든'을 기반으로 한 3D 영상을 보는 순간, 가슴이 두근거렸다. 아, 꼭 삼성이 아니어도 되겠구나. 예술과 기술이 결합된 일을 하면서 살면 행복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으로 '직업'이 아닌 나만의 '꿈'이 생긴 순간이었다.

그때부터 포트폴리오를 만들기 시작했다. 내신과 모의고사 성적으로는 서강대는 꿈도 못 꾸는 상황이었지만, 왠지 모를 확신이 있었다. 담임선생님한테는 말도 안 하고 5개월 동안 혼자 준비했다. 여름방학이 끝나고 포트폴리오를 들고 선생님께 말씀드렸을 때, 예상과 달리 선생님은 "니 성적에 무슨 서강대야"라고 하시지 않았다. 오히려 "너라면 뭐든 잘할 거야"라고 말씀해 주셨다. 선생님은 내 포트폴리오가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하신 것 같았다. 나를 믿어주는 사람이 지금은 훨씬 더 많아졌지만, 그때는 고3 담임 선생님이 유일했다. 담임 선생님이 보여주신 나에 대한 믿음은 그 이후로도 많은 선택을 하는 데 큰 힘이 되었다. 그 믿음 덕분에 입시 불안에 휘말리지 않고 꿋꿋하게 준비할 수 있었다. 비록 서강대 아텍은 서류도 통과하지 못했지만, 그 포트폴리오로 다른 학교에는 합격했으니 결과적으로는 성공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꿈과 일에 대한 새로운 고민들

대학에 와서도 꿈과 일에 대한 고민은 계속됐다. 테크놀로지 아티스트의 꿈을 품고 대학에 왔고 꿈인지 일인지 모를 수많은 경계에서 여러가지 활동을 했다. 그중에서도 가장 꿈에 닿았던 건 '시프리' 프로젝트였다. 음원 저작권 정책이 아티스트에 불리하다고 주장하는 Stop Dumping Music 캠페인에서 시작해서, 사람들이 CD를 더 많이 들을 수 있게 하는 모바일 CD 플레이어 앱을 만들었다. 과 동기들과 함께 완성하고 발표회까지 마쳤는데, 이상하게도 그 후에 엄청 우울해졌다. 꿈을 이뤘는데 왜 이럴까?

그 무렵 내 삶의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던 건 책모임과 마을공동체였다. 매주 한 권씩 책을 읽고 토론하고, 함께 기타를 배우고 맛있는 걸 해먹는 시간들. 마음이 헛헛하던 때에 새로운 사람들과 새로운 생각을 나누는 건 정말 큰 자극이었다.

그때 마을공동체에서 만난 언니가 해준 말이 있다. "꿈은 직업이 아니라 문장이야."

무엇이 되고 싶다가 아니라,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 생각해보라고 했다. 명사가 아니라 형용사라는 것. 꿈은 나의 종착지가 아니라 내가 되어가는 모습이라는 것.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꿈에 대한 이야기에 마음이 두근거렸다.

책모임에서 함께 읽었던 『여덟 번째 방』에서는 더 다양한 꿈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꼰대가 되지 않는 것이 꿈이라는 사람, 내 미래를 생각하며 가슴이 뛸 수 있는 것이 꿈이라는 사람, 사회에서 성공하는 것이 꿈이라는 사람... 이 모든 이야기를 듣고 나서야 비로소 깨달았다. 꿈과 일, 일과 직업, 꿈과 직업을 따로 떼어내어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을.

스무 살이 되던 해, 나는 이 복잡하고도 흥미로운 고민 속으로 완전히 빠져들어갔다.

#shape-of-belonging #year-2019 #에세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