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의 서천 : 따뜻한 햇살과 집을 가득 채운 클래식 FM
올해는 금요일 재택근무를 잘 활용해서 서천에 머무르는 시간을 늘려보려고 한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신지도 3년이 되었고 그 사이에 참 많은 일이 있었지만, 다행인 건 서천집이 튼튼하게 잘 버텨주고 있다는 것. 그동안 조금씩 차근차근 준비해온 것들이 요즘에 와서 하나로 모여드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생각이 잘 정리되지 않지만, 우선은 털어내보는 것으로.
목요일 밤
목요일 밤 퇴근 후 호돌이를 데리러 미아에 갔다. 호돌이를 태우고 깜깜한 서해안 고속도로를 달렸다. 앞 뒤에 차가 한 대도 없고, 도로는 깜깜하고, 가로등도 없는 고속도로. 이런 도로에서 운전하는 경험을 2023년에 많이 해두어서 다행이다. 처음이었으면 정말 무서웠을거야. 집에 도착하니 11시 반이었다. 아빠가 친구 아저씨한테 부탁해서 집에 보일러를 켜두셨다. 따뜻한 바닥에서 호돌이와 함께 잠들었다.
금요일 아침
호돌이가 아침 6시부터 산책가자며 나를 깨웠다. 추운데...패딩을 껴입고 근처 바닷가로 산책을 갔다. 하늘이 정말 파랗고 바람이 많이 불고 춥네. 집으로 돌아와서 거실로 테이블을 옮겼다. 소나무 숲이 보이는 너른 창을 앞에 두고 일하는 호사를 누려봐야지. 9시쯤이 되니 마당쪽 창으로 햇빛이 가득 들었다. 테이블 위로 쏟아지는 햇빛을 쬐며 업무를 했다.
금요일 오후
인터넷 설치 기사님이 왔다. 12월 말에 신청한 건데, 2월 말이 다 되어서야 개통되다니. 집 앞에 있는 소나무숲 때문이었다. 전신주를 집 앞에 하나 더 설치해야 선을 연결할 수 있는데, 전신주 설치하는 것이 너무 오래걸렸다. 그래도 뭐, 다행히 내가 서천에 오는 날에 인터넷 설치 기사님이 오시기로 했고 직접 지켜볼 수 있어서 좋았다고 생각하자. 이 집에 처음으로 인터넷이 깔렸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뒤로도 TV 해지를 안해서 계속 할아버지 이름으로 내던 스카이라이프도 해지했다. 이제는 온전히 이 집의 인프라 비용이 내 명의다. 전기도, 수도도, 통신도, 집도, 땅도.
금요일 저녁
퇴근 후에 온라인으로 심리상담을 했다. 상담 선생님과는 작년 8월에 만났으니, 이제 7개월째다. 그동안 상담했던 중에 가장 오래 함께하고 있고, 나의 깊은 곳의 문제들을 조금씩 꺼내서 하나씩 해결하고 있는 느낌. 내가 항상 머리로 판단하고 생각하려고 해서, 오늘도 마음으로 얘기해보자. 마음으로 생각해보자, 여러번 되뇌였다. 내 마음에게 해주고 싶은 말. 생산성 없어도 돼. 완벽할 수도 없어. 다른 존재들에게 의지해. 그리고 독립해. 굴레를 끊어내. 그러면서 네가 가장 1순위로 살아. 상담이 끝난 후에는 호돌이를 오래도록 쓰다듬었다.
토요일 아침
창문을 열고 안방 청소를 했다. 안방은 할아버지가 살아계실 때 주로 머무시던 공간인데,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뒤에 이 방만 따로 도배 장판을 새로 했다. 그럼에도 잘 관리하지 않아 물건들이 쌓여있었는데,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청소를 시작했다. 청소를 한판 한 다음 창문을 열고 보니, 아니 이 방 뷰가 이렇게나 좋았나. 할아버지 20여년 동안 좋은 곳에서 사셨네. 거실에 있던 텔레비전을 방으로 옮겨왔다. 가족들이 좋아하지 않을지도 모르겠지만, 우선은 내가 있는 동안은 이렇게 있어봐야지. 안방 청소를 끝낸 뒤에 호준님께 문자를 보냈다. 3월에는 서천집을 함께 보고, 2층 철거 검토도 부탁드린다고 연락했다. 호준님은 흔쾌히 좋다고 하셨고, 나도 마음이 조금 편안해졌다.
토요일 오후
밥을 24시간째 안먹는 호돌이가 걱정되어서 간식도 살겸, 주말 동안 먹을 식재료도 살겸 마트를 다녀왔다. 이 동네에는 아무 것도 없기 때문에 운전해서 10분 정도 나갔다 왔다. 호돌이를 뒤에 태우고 다녀오면서 뒷 창문을 살짝 열어주었는데, 시원하게 바람을 쐬는 모습이 너무 사랑스러웠다. 집에 돌아와서 호돌이에게 간식을 주니 드디어 밥을 먹었다. 두부와 잡곡밥과 김을 섞어서 주먹밥을 몇 개 만들어 먹고, 안방에 누워 영화를 봤다. <더 퍼스트 슬램덩크>. 몇 년 전 아주 큰 유행을 했었는데, 당시에 볼 여유가 없던 터라 이제야 봤다. 왜 그렇게나 인기 있었는지 대충 알겠더라. 음악이 좋고 농구 장면과 플래시백 장면이 어우러져서 보는 재미가 있었다. 이 집은 다른 집과 거리가 멀어서 스피커를 엄청 크게 틀 수 있어서, 엄청나게 크게 스피커를 틀어놓고 영화를 봤다. 아 즐거워.
호돌이를 데리고 다사항에 산책을 다녀왔다. 다른 강아지를 보면 너무 과하게 짖어서 산책이 힘들어졌는데, 오늘은 추워서 그런지 사람이 없다. 멀리 뛰어다녀왔다. 아 시원해. 하늘이 예쁘고 바다가 아름답고 햇살이 좋구나. 서천이 이렇게 좋은 곳인거 더 많은 사람이 알았으면 좋겠다.
토요일 저녁
며칠 전 뉴그라운드에서 개인 홈페이지 만들기 워크숍을 모집했다. 베어 블로그로 만든 블로그가 꽤나 맘에 들었고, 다른 사람들과 나누고싶다는 마음이 퍼뜩 들어 급 모집한 워크숍. 6명이나 신청해주셔서 온라인으로 3시간을 함께 하며 홈페이지를 만들었다. HTML이나 CSS, 마크다운이 처음 접하는 분들에게는 어려웠을 수도 있는데, 모두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자기만의 공간을 만들어갈 수 있어서 행복했다.
일요일 아침
돌아가는 날이다. 아침에 일어나서 호돌이 털이 잔뜩 묻은 이불을 털었다. 이불을 털며 호돌이를 마당에 풀어주었다. 신나게 뛰어다니며 마당 곳곳을 탐험했다. 예전에 아궁이였던 쪽은 할머니가 돌아가신 뒤로 10년 넘게 방치되어 있는 곳이라 아무도 잘 안가는데, 꼭 호돌이를 풀어주면 아궁이 근처에 가서 놀아서 나도 그쪽으로 가보게 된다. 엄마는 아궁이를 아예 없애버리고 싶다고 하는데, 나는 그래도 여기서 재밌는 추억이 있는데.. 물론 아빠가 여기서 크게 화상을 입기도 했지만.. 흠 여긴 호준님 오시면 같이 보면서 어떻게 활용하는게 좋을지 고민해봐야 겠다. 호돌이 덕분에 아궁이 구역에 대한 고민을 했다. 호돌아 고마워!
오전 10시반부터는 도희님과 온라인으로 미팅을 했다. 미디어 아티스트인 도희님과 이야기 나누는 것은 언제나 즐겁다. 서로 다르게 살아온 삶에서, 어떻게 하고자 하는 이야기와 전달하고자 하는 방식이 이렇게나 비슷할 수 있을까? 정말 다른 성격의 두 사람이지만, 대화할 때는 참 즐겁다. 3월에는 우선 내가 개념 정리를 해보고, 오프라인으로 모여서 워크숍을 하기로 했다. 우리의 이야기들을 어떻게 풀어낼 수 있을지. 오늘의 대화는 따로 포스팅해서 과정을 기록해둬야지!
일요일 오후
도희님과 미팅을 끝내고 따뜻한 안방 바닥에 누워서 바디스캔 명상을 10분 정도 하고, 좀 더 누워있고 싶었는데, 호돌이가 안절부절 못하면서 계속 끙끙대는 탓에 대충 옷을 낑겨입고 슬리퍼를 신고 밖을 나섰다. 실외배변만 도와주고 들어오려고 했는데 정신차려보니 동네 바닷가로 호돌이와 달리고 있었다. 오후 1시 쯤이었고, 이제 물이 들어오는 참이었다. 아직 저 멀리에서 물이 들어오고 있고, 갯벌이 더 넓은 집 앞 바다. 아 너무 아름답다.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나와서 휴대폰도 안가져왔는데 아니 정말 너무 예쁜데? 하늘은 파랗고 구름은 하얗고 너른 갯벌 너머로 반짝이며 밀려들어오는 물이 보이고, 백사장 위에 조개들이 놓여져있고, 그너머로 깎아지른 해안 절벽과 소나무들. 이 모습이 나에게는 서천이다. 바다와 소나무가 있는 곳. 갯벌과 바다가 있는 곳. 넓은 수평선 너머에서 숨 쉴 수 있게 해주는 곳. 호돌이와 함께 그저 바다를 한참 바라봤다.
이제 집에 돌아갈 시간이다. 햇살이 가득한 안방에 앉아서 잠든 호돌이를 바라보고, 소나무와 대나무가 만들어주는 바람 소리를 들으며 2월의 서천을 기록했다. 이제 또 성남 판교로 돌아갈 시간. 돌아가서 열심히 일상을 살아내고, 좀 더 따뜻해진 3월에 또 와야지. 나의 리틀 포레스트. 이 집을 지켜온 시간들, 나만의 방식으로 삶을 살아내기 위해 해온 많은 노력들. 그 노력들이 하나로 모이는 지금을 소중히 여기면서 살아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