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영수 - 기업가의 방문
무엇이, 우리가 부서짐을 감수하고, 감내하게 한다 생각합니까? 우리의 혁명은 어떠한 정언명령에 따라 인도돼야 마땅하다고 생각합니까?
나에게 부서짐을 감수하고 감내할 만한 어떤 것이 남아 있는가. 되물어본다. 우리 모두가 어떤 것을 이룩하기 위해 달려 나가고 있는 걸까. 사실 요즘은 사는데 회의를 많이 느끼곤 한다. 내가 마지막까지 담고 갈 그 하나라는 것이 무엇이었는지조차 알고 있지 못하는 지금 내가 어떤 것을 위해 살아야 하는지 어떤 것에 나의 생을 걸어야 하는지 전혀 모르겠다. 그 어느 때 보다 더 흔들리고 또 흔들리며 살아가고 있던 중 노영수의 이야기를 읽었다. 무엇을 위해 그는 그렇게도 열심히 그리고 또 단단하게 싸워야 했는가. 그의 이야기가 전개되면 전개될수록 그 이유가 더 궁금해졌다. 사실 그 이유 자체에는 큰 관심이 없었는지도 모른다. 그런 이유를 갖게 되는 건 한 사람의 인생에 있어 어떤 의미인지 궁금해졌다. 타워크레인에 올라가기 전날 고민하던 그의 모습은 그가 무엇을 위해 그렇게 해야만 했는지 그 이유였다. 그의 말을 들으며 내 얼굴은 더욱 더 찡그려졌다. 그렇다면 나는 무엇을 위해 고민해왔는가. 왜 나는 사회를 변화시키고 싶다고 하였고 내가 변화시킨 사회로 이루고 싶은 것은 도대체 무엇인가. 사실 이루고 싶은 사회라는 것이 존재하긴 하는 것일까. 지금까지 나 무엇을 이루기 위해 살고 있는가. 인간으로 태어나 인간이 가장 근본이고 인간이 모든 것을 만들었다고 하는 것을 부정하는 것이 올바른 일인가. 내가 그렇게도 싫어하는 ‘반대를 위한 반대’ 그것이 내가 그렇게도 말하고 다녔던 인본주의에 대한 부정이 아니었을까. 이야기하다보니 나에 대한 부정으로까지 귀결될 것만 같다. 다시 돌아가 보자. 그래도 나는 내가 세상의 모든 것을 짊어진 것처럼 내가 아니면 세상의 어느 것이 해결되지 않을 것처럼 생각하고 말하고 이야기한다. 내일 죽어도 좋다고 말하면서 세상의 작은 것 하나는 변화시켜야 내 삶을 잘 살아냈다고 말하고 싶어 한다. 그런 것들이 의미가 있을까. 그런 세상을 바꾸는 혁명이 존재하기는 한 것 일까 이젠 모르겠다. 이 짧은 글을 쓰며 모르겠다는 말만 몇 번 했는지 모르겠다. 확신이 없는 내 마음이 확신이 없는 내 생각이 나는 혐오스러워지기까지 한다. 확신을 갖는 게 가능하긴 한 걸까. 평생을 지나며 나는 결국 그냥 그랬던 한 인간으로 어느 것도 바꾸지 못한 채 어느 것도 나아지게 하지 못한 채 인생을 끝내버리는 건 아닐까. 애초에 내가 생각했던 방식들은 실은 내 자만과 자아도취에 빠져 말해왔던 건 아닐까 의문이 든다. 내가 어떤 것을 위해 부서질 수 있을까. 그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그래서 결국 내가 원했던 건 무엇이었을까. 진심 하나도 전달하지 못하는 내가 무슨 표현을 하고 또 그 표현을 다른 사람들이 인식할 수 있도록 또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한다는 것일까. 그것을 찾아나가야 겠다. 조금 더 고민해야겠다. 결국 그 결론이 나에 대한 부정이 되지 않도록 그 바닥까지 파도가 부서지는 바닥까지 부딪히고 또 부딪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