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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기와 쓰기 그 사이의 시간

토요일 저녁 약수의 한 노포에서 친구 셋이 모였다. 한 친구는 며칠 전 영국의 인류학자 팀 잉골드의 <라인즈(Lines)>라는 책의 북토크를 다녀왔다고 했다. 이 책에서는 '선의 인류학'이라는 개념을 이야기하고 있는데, 걷기, 관찰하기, 이야기하기, 그리기, 쓰기의 공통점이 모두 '선을 따른다'는 것이라고 했다. 인간과 비인간은 모두 목적을 향해 나아간다. 하지만 인간은 그 과정에서 가는 길의 풍경을 바라본다. 목적지만이 아니라, 그 길 위에서 무엇을 보고 느끼고 생각했는지가 중요한 존재라는 것이다. 이 이야기를 나누다 문득 대화는 ‘그렇다면 AI와 인간의 차이는 무엇일까?’로 흘러갔다. 목적지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생각’을 하는 것이 중요한 존재라면, 인간은 ‘생각’하기 때문에 인간이라고도 볼 수 있는 것일까? 그렇다면 그 '생각'이 사라지고 있다는 건 무엇을 의미할까?"

여기서 내가 며칠 전 읽은 에세이 이야기를 꺼냈다. Derek Thompson이 쓴 'You have 18 months'였다. 편집장이 "AI가 18개월 안에 모든 일자리를 빼앗을 것"이라는 주제로 글을 쓰라고 했지만, Thompson은 다른 걸 말했다. AI가 일자리를 빼앗는 게 문제가 아니라, 인간이 이미 가지고 있는 아주 중요한 것을 이미 스스로 훼손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가 말하는 인간의 가장 중요한 것은 생각(mind)이었다. 그리고 그 생각을 지탱하는 두 기둥은 읽기(reading)와 쓰기(writing). LLM과 생성형 AI의 등장 이후, 우리는 더 이상 스스로 읽지도 쓰지도 않는다. 그렇게 읽지도 쓰지도 않으면 생각할 수 없게 되고, 그건 인간이 가진 가장 고유한 것을 잃는 일이다.

Thompson은 피트니스의 'time under tension' 개념을 예로 들었다. 같은 무게라도 2초 스쿼트와 10초 스쿼트는 다르다. 후자가 더 힘들지만 더 많은 근육을 만든다. 생각도 마찬가지다. 거의 연결되지 않는 아이디어들과 인내심 있게 앉아 있는 시간, 그 시간이 생각을 새로운 무언가로 엮어낸다. 하지만 생성형 AI 이후, 우리는 그 'time under tension'을 견디지 못한다. 조금 생각하다 AI에게 바톤을 넘기는 게 일상이 되었다. 생각의 근육을 만드는 시간이 사라지고 있는 것이다.

여기까지 얘기를 나누고 나서, 이제 인간은 읽기도 쓰기도 퇴화하고 말았다며 ‘아무래도 우리는 영영 망한 것 같아’’라는 자조적인 웃음을 지으며 막걸리 잔을 부딪혔다. 다른 친구는 읽기와 쓰기가 모두 퇴화하고, 이제는 듣기도 퇴화하기 시작할 것이라 했다. 서로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게 될 것이고, 점점 1인화 되고 서로 소통하지 않고 조우하지도 않는 시간이 되어버리지 않을까 하는 생각. 나는 고개를 저으며 쓴 웃음을 지었지만, 그럼에도 그렇게 영영 망하거나 퇴화하지 않기 위해 나는 어떻게 살고 있나하는 생각으로 이어졌다.

나는 의도적으로 비움의 시간을 가지면서 살고 있다. 유튜브의 검색 기록 수집 기능을 꺼두어서 내 화면은 구글 검색창처럼 텅 비어 있다. 인스타 릴스도 거의 보지 않는다. 대신 거실 리클라이너에 앉아 안테나로 FM 93.1에 주파수를 맞추고 클래식FM 라디오를 들으며 어려운 스도쿠 문제를 푼다. 최근에는 피아노 레슨도 시작했다. 왼손, 오른손, 박자, 페달, 화성... 신경 써야 할 게 너무 많아서 딴 생각이 비집고 들어올 틈이 없다. 온전히 하나에 집중하는 시간을 가지며 머리를 텅 비운다.

역설적으로 생각을 만들기 위해서는 생각을 하지 않아야 하는 시간이 필요한 것이다.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생각의 비움'에는 두 종류가 있다. 릴스를 보며 뇌를 녹이는 수동적인 비움과, 피아노 건반 앞에서 온전히 집중하는 것. 전자가 타인이 설계한 자극에 끌려다니며 끊임없이 다음 것으로 넘어가는 수동적 비움이라면, 후자는 내가 선택한 집중, 온전히 현재에 존재하는 능동적 비움이다. 그 시간들 덕에 나의 진짜 고유의 생각들은 외부의 소음으로 오염되지 않고 내 속에서 조용히 발효된다. 기술이 나의 주체성과 관심을 빼앗으려 부던히 노력하는 와중에도, 인간으로서의 고유성을 지키려는 고군분투라고도 할 수 있겠다.

처음부터 이렇게 행동한 것은 아니었다. 생성형 AI가 일상화 되고, 특히 클로드를 처음 쓴지 몇 달 되지 않았을 때는 스스로 생각하는 시간이 점점 줄어들었다. 겨우 3줄 정도 생각한 후에 클로드에게 이 생각을 어서 보여주고 싶어 달려갔다. 이것을 몇 달 반복하다보니 점점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러다간 나 스스로 생각하고 쓰는 법을 완전히 잊어버리겠는데? 이것이 나의 생각인지 클로드의 생각인지 구분할 수가 없겠는데? 그런 걱정에 닿기 시작했을 때 클로드에 상세한 인스트럭션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 중 하나가 '건강한 사고 독립성 지원'이었다. 내가 lazy thinking mode일 때 바로 답을 주지 말고 "너는 이걸 어떻게 생각해?"라고 먼저 물어보라고. 진짜 막막할 때만 도와주고, 나머지는 내가 직접 생각할 수 있게 시간을 주라고. 이렇게 설정을 하고나니, 바로 시원하게 답을 주지않는 클로드가 답답해서인지 예전보다 확실히 의존도가 낮아졌다는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이게 얼마나 유지될 수 있을까. 나 혼자서 이렇게 노력을 한다해도, 쉴틈없이 밀려들어오는 기술의 파도가 이어진다면 개인으로서의 내가 버텨낼 수 있을까? ‘아무래도 우리는 영영 망한 것 같아.' 토요일 밤, 막걸리 잔을 부딪치며 했던 말이 자조적인 농담만은 아닐지도 모른다. 어쩌면 이건 이미 져버린 싸움일 수도 있다. 나 혼자 알고리즘을 차단하고, AI에게 인스트럭션을 만들어주고, 피아노를 연습한다고 해서 세상이 바뀌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나는 오늘도 피아노 건반 앞에 앉는다. 왼손, 오른손, 박자를 맞추다 보면 어느새 30분이 훌쩍 지나간다. 그리고 그 시간 동안, 내 머릿속 어딘가에서는 이 글의 다음 문장이 조용히 만들어지고 있을 것이다.

이게 의미 있는 저항인지, 아니면 그냥 개인적 위안에 불과한지 나도 모르겠다. 하지만 적어도 나는, 이 질문을 던지는 사람으로 남고 싶다. 인간이 목적을 향해 달려나가는 그 선 위에서 주위를 찬찬히 둘러보며 생각하는 것, 그게 정말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일인지, 그 질문을 놓지 않는 사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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