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아버지와 함께한 기억들
- 아빠 손을 잡고 한창 공사가 진행 중이던 서천 집의 화장실 턱을 넘던 기억이 난다. 이게 이제 할아버지 집이야? 아빠는 그렇다고 했다.
- 추석, 설 명절이면 아빠 차를 타고 서천에 갔다. 서천 집 앞에는 소나무 숲이 있었는데, 그 숲의 돌에 앉아 햇빛을 쬐기도 하고 아빠가 나무 사이에 달아준 그네를 타고 놀기도 했다. 언니랑 사촌오빠들과 콩벌레를 잡아다가 할아버지 바둑판 위에 경주로를 만들고 콩벌레 경주를 시키고 놀았다.
- 10년 전, 할머니가 돌아가신 뒤로는 서천에 내려가는 대신에 의왕에 있는 큰아버지 집에서 차례를 지냈다. 할아버지가 기차를 타고 경기도로 올라오셨다. 할아버지는 큰집에 있는 걸 그렇게 좋아하시지 않으셨는지, 매번 빨리 집에 내려가고 싶다고 하셨다. 눈이나 귀가 어두워지기 전까지는 집 앞 산책도 하셨는데, 눈과 귀가 어두워지신 후로는 큰집에 올라와있는 며칠 동안 방에 누워만 계셨다. 그때 할아버지 옆에 누워서 6.25 전쟁에 끌려가다가 도로 집으로 돌아온 이야기를 들었다. 그때 나랑 친구랑 전쟁터로 가는 줄도 모르고 앉아있었어. 그러다 우리 아버지가 와서 나만 데리고 갔어. 나랑 같이 있던 그 친구는 못 돌아왔어. 80년도 더 된 이야기를 하면서도 생생해보였다. 할아버지 눈이 슬퍼보인다고 생각한 건 그 날이 처음이었다.
- 할아버지의 아버지, 그러니까 증조 할아버지는 꽤 돈이 많고 명망있는 지역의 유지였다고 한다. 왠지 우리 아빠와 풍채나 걸음걸이, 호탕한 면모가 닮았을 것 같다. 증조 할아버지가 할아버지가 전쟁터에 끌려가지 않도록 데리고 온 후로 공부를 시키고 대학에 보냈다고 했다. 그 시절에 서울에 있는 대학을 보낼 수 있을 정도의 재력과 지식이었다면, 대충 짐작은 간다. 할아버지는 과학 선생님을 했었다고 했다. 어릴 때 명절이면, 할아버지가 손자 손녀들을 데리고 골든벨을 열었다. 무슨 문제를 풀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지만, 막내였던 내가 나름 선전했다는 건 기억난다. 골든벨 우승 소원으로 할아버지한테 업어달라고 했던 일도.
- 할아버지의 서천 집, 아빠가 지은 집, 많은 어릴적 추억이 있는 그 집을 물려받던 날에 할아버지는 옛날 복덕방에서의 일을 이야기했다. 동네 복덕방에 앉아서 담배를 피고 있었는데, 그 때 글 쓸 줄 아는 사람이 자기 밖에 없었다는 이야기. 그냥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 부동산 문서에 글을 몇 자 써주었을 뿐인데, 사람들이 좋아해주었다는 이야기. 그 이야기를 하며 담배를 피던 92세의 할아버지는 행복해보였다. 그리고 그 날을 마지막으로 할아버지는 점점 생의 마지막에 가까워졌다.
- 살아있는 할아버지를 마지막으로 본 것은 8월이었다. 급격히 상태가 안 좋아졌던 할아버지는 하루 중 많은 시간을 잠을 잤다. 거동이 불편해지고, 화장실을 혼자 가는 것도 어려워졌다. 음식도 많이 드시진 않았는데, 엄마가 고기를 넣은 국과 낙지를 넣은 국을 끓였다. 고기와 낙지를 잘게 자르고 국에 밥을 말아서 할아버지를 먹여드렸다. 많이 드시진 않았지만, 그래도 드실 수 있었다. 저녁에 할아버지한테 고깃국이랑 연포탕중에 뭐가 더 좋아? 라고 물었더니, 고깃국이라고 했다. 할아버지의 장례식을 치른 서천장례식장은 쇠고기무국이 맛있었다. 원래 이런 국밥은 잘 좋아하지 않는 나도, 맛있게 며칠을 먹었다. 할아버지 대신에 내가 고깃국을 실컷 먹었다.
- 할머니는 내가 고3이 되던 3월에 돌아가셨다. 스물이 되고나서부터 나는 혼자서 서천에 자주 갔다. 할아버지가 혼자 계시기도 했고, 그냥 서천에 혼자 가는 게 왠지 좋았다. 할아버지는 말이 많은 편은 아니라 그냥 옆에 있기만 해도 좋았다. 그 때 할아버지는 80대 초반이었는데, 갯벌을 지키러 가야 한다고 일주일에 몇 번씩 나가셨다. 동네 사람들이 망가진 갯벌을 살리기 위해 조업을 중단하고 외부인의 조업을 감시하는 일을 한다고 했다. 언덕에서 갯벌까지 뒷짐을 지고 걸어 내려가던 할아버지의 뒷모습이 아직도 생생하다.
- 아빠와 크게 싸우고 (사실 일방적으로 욕을 얻어먹고) 인턴을 하던 회사에 출근했던 어느 겨울날, 퇴근 길에 곧장 서천으로 가는 버스를 탔다. 할아버지는 무슨 일이냐고 묻지도 않으시며 내가 만든 두루치기를 맛나게 드셨다.
- 내가 처음으로 만든 IT 프로덕트는 할아버지가 서천집 2층에 만든 민박집의 예약 사이트였다. 초등학생이었던 내가 나모 웹 에디터와 알 FTP를 이용해서 사이트를 만들었다. 몇 건의 예약도 발생했던 걸로 기억한다. 이 사이트로 상장도 받았다.
- 서천집 2층에 민박집을 만들기 전에는 넓은 옥상이었다. 그 옥상에서 이런 저런 놀이를 하며 자주 놀았는데, 내가 제일 좋아했던 건 집들이 놀이였다. 공사하고 남은 벽돌을 이글루처럼 쌓아다가 돗자리를 깔고 집을 만들었다. 2층에 집을 만들었으니 놀러오라고 가족들에게 말했는데 아무도 올라오지 않았다. 한참동안 돗자리에 혼자 앉아 놀고 있었는데, 엄마가 큰 병에 담긴 오렌지 주스를 들고 계단을 올라왔다. 엄마랑 오렌지 주스를 마시며 집들이를 했다.
- 할아버지는 10년 동안 혼자 서천 집에 지내시는 동안 이런 저런 일을 벌였다. 집 뒤 작은 마당에 비닐하우스를 만들어서 희리산 쪽파 사업을 하기도 하고, 염소 몇 마리를 키우고, 닭을 키웠다. 염소를 키워서 팔고, 고모나 큰엄마의 몸보신으로 주기도 했다. 우리 엄마에게도 몇 번 권했는데, 엄마는 끝까지 거절했다.
- 할아버지 집에는 언제나 많은 생명체가 드나들었다. 바둑을 두러 오는 동네 할아버지들부터 할아버지를 ‘의원님’이라 부르는 동네 아저씨 등 사람은 물론이고, 길고양이와 길강아지(?)까지. 할아버지는 모든 고양이를 나비라 부르고, 모든 강아지를 포도라 불렀다. 나비와 포도에 대해서는 정말 많은 기억이 있는데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이야기해야할지. 나중에 더 깊게 기억해봐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