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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 참지 않기, 서천에서의 5일

할아버지 댁은 충남 서천이다. 아빠가 어렸을 적에는 인구가 15만은 되었다던데 지금은 5만 정도로 줄었고, 평균 연령도 65세가 넘는 초고령 지역이다. 요근래에 모든 것에 지치고 아무것도 하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던 터라, 조용하고 느리고 바다가 있는 서천 집에 일찍 내려가서 오래 쉬고 싶었다. 가족들보다 삼일 먼저 버스를 타고 서천에 내려갔다.

​첫 날은 차가 조금 밀려서 집에 도착하니 저녁 8시 쯤이었고, 불쌍하게 묶여있는 마당의 강아지를 잠시 보다가 일찍 잠에 들었다. 다음 날 일어나서 보니 강아지를 풀어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너무 짧은 줄에 묶여있는데다가 주변 청소는 하나도 되어있지 않았다. 어렸을 때부터 마을에 풀어놓고 때되면 집에 잘 들어오는 그런 강아지였는데 마을 농작물을 밟고다녀서 묶어놨다는 얘기였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런 환경은 너무한거 아닌가 싶었다. 할아버지가 안 보는 틈을 타 목줄을 풀어주고 대문을 닫아두었다. 마당에서 뛰는 것 만으로도 강아지는 훨씬 행복해보였다.

​할아버지 아침 밥을 챙겨드리고, 나는 집 앞 마트에서 사온 식빵과 치즈, 단호박 무스를 가지고 토스트를 만들어 먹었다. 동네 카페 드립백을 맛있게 내려서 마당에 앉아 먹으니 마음이 평안해졌다. 생각해보니 서천에 혼자 내려와서 있었던 적이 이전에도 몇번 있었는데, 매번 힘들었던 때였다. 대학 입시를 마치고 지쳐있던 스무살의 겨울이나, 아빠와 크게 싸우고 집에 가고 싶지 않아서 짐을 싸고 터미널로 향했던 어느 겨울의 시간들. 생각해보면 힘들어서 서천으로 도망왔던 날에는 겨울이 더 많았다. 그리고 서천을 다녀오면 그래도 얼마간은 힘든 마음이 해소되었던 것도 같고. 이번에도 그럴 수 있을까. 따뜻한 커피를 마시고 마당에 앉은 강아지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서천 할아버지 댁은 걸어서 5분 거리에 바다가 있는 어촌마을이다. 서해 바다라서, 물이 들어오는 시간(만조) 물이 나가는 시간(간조)에 따라 바다가 보여주는 모습이 확 달라진다. 예전에는 갯벌에 아빠 차(갤로퍼)를 타고 들어가서 바지락도 캐고, 맛조개도 잡고 했었는데 언젠가부터 바다에 생명체가 없다고 했었다. 그러다 어촌 공동체의 어떤 논의가 있었는지, 얼마간 조업을 하지 않기로 결정했고 마을 사람들이 돌아가며 바다를 지켰다. 할아버지는 지금 90세인데, 아마 80대였을 몇 년전에 바다를 지키러 가야한다며 일주일에 몇 번을 바다에 가셨다. 그렇게 마을 사람들이 약속을 지키고, 바다를 지켜서, 다시 바다를 돌려놨다. 이제는 다시 갯벌에 생명체가 산다. 사람이 많지는 않지만 낚시를 하는 사람도 여럿 보였다.

​- 자율관리어업 우수공동체 최우수에 '충남 서천서부소형선박' 선정

구글에 '서천 물 들어오는 시간'이라고 검색하니 만조 시간이 오후 두시 반 쯤이라고 나왔다. 보조기를 차야하긴 하지만 이제 살살 걸을 수 있게 되었으니 물이 들어올 때 쯤 바다 산책을 다녀와야지 싶었다. 이어폰은 들지 않고, 휴대폰과 멍상 노트,펜만 챙겨서 집을 나섰다. 강아지도 내 뒤를 졸졸 따라왔다. 동네 분들이 강아지를 알아봤다. "대박아~~"(강아지 이름) 라고 부르는 동네 분들이 많았다. 대박이는 온갖 집 강아지들과 다 인사하면서 신나게 동네를 총총총 걸어다녔다. 행복해보여서 기분이 좋았다. 대박이를 한 번 봤다가, 하늘을 봤다가, 발이 아파서 잠시 멈췄다가. 느린 서천의 시간만큼 느린 산책을 했다.

​바다는 내가 어렸을 적부터 봤던 서천 바다 중에 가장 예뻤다. 날씨는 맑았고 강아지는 귀여웠고 마음은 평화로웠다. 바위에 앉아 멍상을 했다. 숨을 들이쉬었다가, 내쉬었다가를 반복했다. 시원하고 따뜻한 바람이 느껴졌고, 귓가에는 잔잔한 바다 소리와 강아지의 숨소리가 들렸다. 나무가 사락거리는 소리도. 햇볕은 따뜻했고 잠시 눈을 뜨면 눈 앞에 가득한 하늘과 바다가 있었다. 사람은 없었고, 소음도 없었다. 한참 멍상을 하고 멍상 노트를 펼쳤는데, '숨은 어때?'라는 질문을 보니 문득 내가 일상을 살면서 자주 숨을 참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막막하면 숨을 참고, 답답하면 숨을 참고, 그냥 숨을 쉬기 싫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았다. 이렇게 들이쉬고 내쉬는 것만으로도 좋은 것을 왜 못했었지, 사는 것이 많이 힘겨웠다보다 싶었다. 서천에 머무는 동안 숨 쉬는 법을 배워야지 생각했다.

대박이와 바닷가 산책을 다녀오고 낮잠을 자고 있었는데 큰집 식구들이 왔다. 마당에 풀을 정리한다고 서천 시내에 예초기를 빌리러 간 사이 마당 물청소를 했다. 지저분하게 방치되어있던 대박이가 있던 자리를 깨끗이 치웠다. 그릇을 닦고 물로 여러번 청소를 하고 나니 힘들면서도 개운했다. 청소를 다 하고나선, 커다란 대야에 물을 받아 발을 담그고 하늘을 바라봤다. 계속 사고가 나서 몸과 마음 모두 안 좋았던 탓에 제대로 여름 휴가를 못 갔는데, 대야에 발을 담그고 편한 의자에 앉아 바람을 맞으니 못간 여름 휴가의 아쉬움이 조금은 달래졌다.

​서천 시내에서 돌아온 사촌 오빠1이 바베큐를 해먹자며 마당에서 불을 피웠다. 그냥 별 걱정없이 저녁을 먹고, 맥주를 마시고, 불을 바라봤다.

다음 날 오후에도 대박이와 해안가 산책을 했다. 어제보다 조금 더 늦은 시간에 갔는데, 물이 많았고 바람이 강했다. 비가 오려고 바람이 강했던 것 같은데, 바닷바람을 맞으며 가만히 앉아있는 순간이 참 행복했다. 이 순간의 기억으로 또 힘을 내어 살 수 있겠다 싶었다. 그보다 더 좋았던 건 고개를 돌리면 대박이가 곁에 앉아있다는 사실이었다.

산책을 하면서, 마당에 앉아서, 하늘을 자주 바라다 볼 수록, 왜 나는 이렇게 커다란 화면을 두고 다른 작은 화면만 들여다봤을까 생각했다. 와치의 화면, 휴대폰의 화면, 노트북의 화면, 빔 프로젝터가 만든 화면, 커봐야 방 벽 하나 정도인 세계에 나의 시야를 가두고 있던 건 아니었을까. 아무리 코로나 시국이고, 다리를 다쳤다 해도, 창문을 열고 창 밖의 하늘을 바라보는 일 정도는 충분히 가능했을 텐데. 내가 갇혀있는 건 몸이 아니라 마음이었나 싶었다. 낮은 몸에 갇혀있대도, 높은 마음으로 살아야지. 다시금 노랫말을 곱씹었다.

​서천의 넷째날 아침, 드디어 우리 가족들이 왔다. 새벽 쏟아지는 비를 뚫고 엄마와 언니, 아빠가 도착했다. 아침부터 차례를 지내고, 밥을 배불리 먹고 나선 감을 땄다. 할아버지 집 앞에는 20년 전 이 집을 지을 적에 심은 커다란 감나무들이 있는데, 올해도 단감들이 잔뜩 열려있었다. 감 따는 기구를 이용해서 감을 땄다. 너무 멀리있는 감을 따려고 기구를 잔뜩 늘렸다가 고정부위가 금이가서 아빠가 철사로 감아줬는데, 잠시 잘 작동하는 것 같더니 제대로 고정이 되지 않았다. 그래도 그 사이에 감을 많이 땄다. 딴 감을 바로 먹었는데, 맛있었다. 이런 게 수확의 기쁨인가!

​오후에는 아빠 차를 타고 다같이 다사항에 갔다. 아주 가까운 항구였는데, 파도가 엄청 강해서 구경하는 재미가 있었다. 가족은, 함께해서 행복하면서 불행한 모든 면을 다 가지고 있는 존재지, 알고 있던 사실을 매번 재확인하는 것도 인생을 사는 동력인가 싶고. 복잡한 마음이 들었지만, 햇빛과 파도가 부셔지는 바다는 나름 아름다웠으므로 넋놓고 바다를 바라봤다.

​밤에는 빗자루 위에서 잠든 대박이를 바라보며 엄마와 보름달을 구경했다. 한산 소곡주를 한잔씩 마시면서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눴다. 힘들기만 한 요즘이었는데, 나에게도 엄마에게도 이 시간이 따뜻한 시간이 되길 기도했다. 보름달이 크고 예쁘게 떠서 소원을 가득 빌었다. 최대 용량 까지 꽉꽉 채워서 소원을 날렸다. 달님 꼭 들어주시는거죠?

​한창 밖에서 달 구경을 하다가 날이 추워서 거실로 들어왔는데, 거실 창문에서도 달이 보였다. 넷이 누워 달을 한참 바라보다 잠이 들었다. 서천에서 처음으로 따뜻하게 잘 잤던 날이었다.

​다음 날에는 엄마 아빠가 주워온 알밤을 골랐다. 벌레먹은 애들은 할아버지가 키우는 염소 밥으로 당첨. 알밤이 귀여워서 고르는 재미가 있었다. 냉장고에 머칠 묵혀두고 먹으면 더 달아지는 밤, 올 가을 간식이 넘쳐나서 행복했다.

​대박이와 마지막 오후 산책을 했다. 꼬리는 여우 꼬리, 누워 자는 건 고양이같고, 몸뚱이는 토끼같은 귀여운 강쥐 대박이를 두고 가는 게 슬펐지만 그래도 대박이가 있어서 지쳐있던 내 마음도 많이 회복되었다. 마지막 날 저녁에도 마당에 엄마랑 앉아서 소곡주를 마시면서 대박이를 바라봤다. 운전 연습도 할 겸, 작은 중고차를 어서 사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전에 유기견 봉사를 하고 싶어서 알아본 적이 있었는데 대부분의 보호소는 외곽 지역에 있어서 차가 없으면 가기 불편한 곳이 많았다. 차를 사면 엄마랑 같이 유기견 봉사를 다니기로 했다. 회복되는 느낌이 들었다. 그렇게 서천에서의 다섯번째 밤도 끝이 났다.

​다음 날 새벽 아침 일찍 출발했다. 귀여운 대박이도 안녕, 90세의 나이에도 염소 줄 밥 풀을 베는 할아버지도 안녕, 튼튼 감나무도 안녕, 숨 쉬는 법을 알려준 작은 바닷가도 안녕. 언젠가 또 마음이 힘들어지는 날이 오면 돌아와야지. 감사한 가을 날 휴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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