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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을 받아 굴레를 끊을 만큼 강해지거라

기주삼촌은 그냥 옛날부터 기주삼촌이었다. 엄마의 남동생, 근처에 사는 것도 아니고 명절마다 얼굴 보는 건 다른 친척들이랑 똑같은데, 호칭 때문이었으려나. 기주삼촌은 언제나 멀지 않은 사람처럼 느껴졌다.

IMG_1371 | 삼촌이 꺾어준 산두릅과 고사리. 작년 5월.

기주삼촌은 운전을 잘 하고, 험하게 하고, 목소리가 크고, 유행하는 TV프로그램을 좋아했다. 강아지를 좋아해서 물을 뜨러 다녀오는 길에 다른 집 강아지들에게 줄 소시지를 차에 한가득 들고 다녔다. 5년 전 폐암 선고를 받았을 때, 당시 내가 런던 세인트 폴 성당에서 사서 건네준 묵주를 목에 걸고 다녔다. 불교라서 묵주가 목걸이가 아닌 것도 모르고. 조카가 자신을 위해 사다줬다며 그 큰 머리에 묵주를 끼워서 들고 다녔다. 같이 산에 올라서 산두릅을 잔뜩 꺾어줬다. 내가 꺾은 고사리는 누가 먹게 이렇게 작은걸 꺾냐며 잔소리도 한 사발씩 했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친구에게 나를 '우리 예쁜 조카'라고 소개했다. 친척이 그렇게 많은 데도, 누군가 나를 이렇게 애정어리게 불러준 적이 없어 기분이 좋았다. 좋지도 않은 자전거를 타고 쌍치 언덕 여기저기를 밤이고 낮이고 타고 다녔다. 더 살겠다는 집념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 덕분이라고 해야하나. 삼촌은 큰 아들 결혼식도 봤다. 기주삼촌은 화도 잘 냈지만 잘 웃기도 했다. 농담인지 진담인지 모를 장난을 자꾸만 쳐서, 사람들을 웃게 만들었다. 내가 이상형이 있다면 기주삼촌처럼 유머있는 사람이라고 했다. 이모들이 숯불고기를 곁들여 주는 냉면집 간판에 '고기주는 냉면'이라고 써있던 걸 보고, '고기주 = 냉면'이라며 웃을 때도 있었다. 그 후로 냉면 집만 지나가면 간판에 '고기주는 냉면'이라고 안 써있나 한 번씩 다시 보게 됐다. 앞으로도 그렇겠지.

​기주삼촌이 세상을 떠나기 전날에 엄마가 하루 종일 불안하다고 전화가 왔다. 다음 날에 전주 호스피스 병동에 내려가보라고 아침 일찍 기차를 끊어줬다. 그리고 그대로 마지막이었다. 그럴 줄은 몰랐다. 그 날이 언젠가 올 줄은 알았지만, 이렇게 갑자기 일줄은. 연말이지만 여전히 착잡한 마음이 가득해서 아침에 만난 다른 팀 동료분과 점심 식사를 하고 있었다. 요즘 고민인 회사 내 인간관계 문제를 털어놓고 이야기를 한참 하고 있던 차에, 언니한테 전화가 왔다. 점심 시간에 언니가 나에게 전화를 할 일이 없는데 왠지 마음이 불안했다. 동료 분의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눈은 전화기에 고정되어 있었다. 이야기가 끝나자마자 양해를 구하고 전화를 받았다. 침착한 언니의 목소리에도 눈물이 났다. 엄마가 전주 내려간지 몇 시간만에 이렇게 되다니. 이렇게 될 줄 알고 엄마에게 내려가라고 했던 건 아니었는데, 마음이 아팠다. 눈물이 났다. 동료 분께 사정을 이야기하니, 같이 울어주셨다. 감사했다.

​기주삼촌 덕분에 하루 일찍 연말 휴가를 시작했다. 원래 계획은 23일부터 연말까지 쭉 휴가를 사용하는 것이었는데, 삼촌을 보낼 수 있도록 하루 휴가를 더 쓸 수 있었다. 3일간의 장례 절차는 계속 삼촌을 보내고 또 보내고, 또 보내는 일이었다. 과정 속에서 가족들 서로 서로가 도우며 지침을 견뎌냈다. 빈소를 차리고, 손님을 맞이하고, 조화를 받고, 입관을 하고, 또 손님을 맞이하고. 장례식 마지막 날 밤에는 삼촌의 친구들이 와서 삼촌을 위해 술을 마셔주고. 다음 날 삼촌의 친구들이 관을 들었다. 서울 장례식장에서 공주에 있는 화장장으로, 화장장에서 장지까지. 그 긴 길을 가족들과 삼촌의 친구들이 함께했다. 12월 말인데도 날이 하나도 춥지 않았다. 할아버지 옆에 삼촌의 유골함을 묻었다. 하늘이 파랗고, 바람은 시원했다. 12월이 아니라 5월 날씨 같이 따뜻했다. 햇빛이 잘 드는 좋은 자리에 삼촌을 두고 마지막으로 제사를 지냈다. 삼촌이 좋아하는 고사리 나물도 있었다. 이 산에서 삼촌이랑 고사리 꺾었는데, 그 생각이 나 또 눈물을 훔쳤다. 사람이 정말 많았다. 동네 사람들, 삼촌 친구들, 가족들까지 거의 30명은 넘는 사람들이 묘 자리의 잔디를 심었다. 멋진 구두를 신은 삼촌도, 하얀 운동화를 신은 나도 잔디가 잘 자라도록 흙을 열심히 밟았다.

저들에게 양쪽 가족은 힘이 될까, 굴레가 될까, 힘을 받아 굴레를 끊을 만큼 강해지거라. (박완서, <아주 오래된 농담>)

​열심히 흙을 밟으며 오래전 읽었던 책의 구절이 맴돌았다. 가족이 굴레든, 힘이든, 결국은 힘을 받을 수 있는 존재라고, 그리고 강해져야 하는 건 스스로의 몫일 뿐이지만, 이 만큼의 힘을 줄 수 있는 것도 가족이라고. 여러 감정 속에서 이런 생각을 했다.

​기주삼촌이 세상을 떠나던 시간에, 할머니가 혼자 계시는 쌍치 집 마당에 벌 한마리가 날아들었다고 했다. 벌 한마리가 웽- 하고 마당을 한바퀴 휘 돌고 떠났다고 했다. 할머니는, 그 벌을 보고 기주가 갔구나. 생각했다고 했다. 얼마지나지 않아 이모에게 전화가 왔고, 할머니는 이미 알고 있었다고 했다. 삼촌의 묘를 정리하고 있던 시간에도 벌 한마리가 왔다. 엄마는 기주야? 라고 말했다. 현미이모는 나비도 아니고 새도 아니고 무슨 벌이냐며, 꼭 지같은 게 되었다며, 오빠 이제는 부드러운 남자가 되어야지. 라고 너스레도 떨었다. 내가 삼촌한테 벌 딱 어울린다고 했다. 톡 쏘는 사람, 협력하며 꿀을 모으는 사람, 삼촌이랑 잘 어울려. 나도 힘을 받아, 굴레를 끊을만큼 강해져야지. 이 다짐의 포인트는 굴레를 끊는 것이 아니라, 힘을 받는 것과 강해지는 것에 있다.

#year-2021 #에세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