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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든 경계에 서서 어디로든 갈 수 있다면

한 달 전, 나의 지난 주말 계획은 고등학교 동창 친구와 펜타포트 락 페스티벌에 가는 것이었다. 금요일은 친구와, 일요일은 혼자 가려고 했다. 그러다 어떤 독서모임을 보게되었고 그 모임에 가고 싶어져서 금요일 펜타포트를 취소해야겠다고 연락을 했다. 친구는 고맙게도 흔쾌히 받아주었고, 다른 페스티벌을 가면 된다고 얘기해주었다. 일요일은 혼자서라도 다녀와야지. 락페 없는 여름은 앙꼬없는 찐빵이잖아. 하지만 나는 최근 락 음악을 잘 듣지 않았다. 요즘 젊은이들 사이에서 인기가 많은 바밍타이거나 실리카겔, 한로로의 음악을 들어는 보았지만 딱히 내 취향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오히려 일요일 라인업에서 내가 보고 싶었던 건 송소희였다. 지난 봄 이사를 준비하며 Not a dream을 정말 많이 들었는데, 그 음악을 너른 송도 공원에서 들으면 얼마나 좋을까 싶었다. 그러다 펜타포트 타임테이블이 떴다. 그 타임테이블이 떴을 때쯤 나는 은지언니와 워터밤에 갔다가 더위로 반실신할 뻔 했으므로 송소희가 몇시에 나오는지가 나의 주요 관심사였다. 왜 슬픈 예감은 틀리지 않는지. 송소희는 가장 뜨거운 12시에 스테이지에 오른다고 적혀있었다. 포기가 쉬웠다. 콜라 한 캔으로 종일 한강난지공원 락페스티벌을 즐기던 열다섯의 민석과 하루 놀면 일주일 쉬어야하는 서른 두살의 민석 사이엔 시간이 두 배나 흘러버렸으니까.

그렇게 펜타포트를 모두 포기하고 집에서 쉬는 것을 선택했다. 금요일은 재택근무를 했고, 토요일에는 오랜만에 미용실에 가서 머리를 했다. 한 4시간쯤 단발펌을 하고 돌아와선 욕조에 찬물을 가득 채우고 수영복을 입고 들어가서 혼자 물놀이를 했다. 인스타그램을 켜니 모두가 펜타포트에 있거나 정동진 영화제에 있는 것 같았다. 나는 너무 편안하고 시원하고 즐겁고 행복한데도 왠지 뒤처진것 같았다. 찬물에서 나와 포도 한 송이를 먹고 에어컨을 틀고 보송한 하얀 이불에 누워 낮잠을 잤다. 자고 일어나서 또 인스타그램을 켰다. 혁오가 멋진 선셋 아래에서 톰보이를 불렀다고 스토리를 넘기는 내내 사람들이 얘기를 했다. 그 사이에 인플루언서들의 여름 옷 광고가 아른거렸다. 행복한 낮잠 시간을 보내고 나서 또 기분이 조금 안좋아졌다. 인스타그램에 안좋은 것만 있는 건 아니었다. 함께 일하는 동료들의 고민이 담긴 7월 회고를 읽을 수 있었고, 애정어린 댓글을 달아줄 수도 있었다. 그렇게 또 복잡한 마음을 느끼다가 리클라이너에 누워 야구를 봤다. 우리 정원이가 데뷔 첫 끝내기 안타를 쳤다. 함께 야구 보며 카톡하는 야구친구들 단체방이 불이 났다. 중계가 끝나고도 한참을 끝내기 안타를 돌려보다 그대로 리클라이너에서 잠들었다.

눈을 뜬 건 새벽 4시였다. 아맞다 저녁인증. 6월부터 매일 아침 6시 반에 줌으로 모여 경제 도서를 읽고, 매일 매일 투두 인증을 하고 경제기사를 읽는 모임 숙제가 생각난 것이다. 저녁 인증도 하지 않고 거실에서 잠들다니. 바로 서재로 가서 책상에 앉았다. (다행히 저녁 인증 마감 시간이 새벽 4:59까지였다.) 저녁 인증글을 올리고 나니, 어젯밤 야구 끝나면 건조하러 가려고 돌려둔 세탁기가 생각났다. 아차차.. 다행히 집앞 런드로맷은 24시간이니까 생각난 김에 가야겠다. 빨래감을 들고 터벅터벅 걸어갔다. 건조기가 도는 삼십분 동안 새벽 바람을 맞으며 공원 산책을 했다. 건조기가 다 돌고나니 어느새 해가 떴다. 집에 돌아와서 옷과 수건을 넣어두고 아침 인증 숙제를 했다. 그리고 다시 (이번에는 침실 침대에 제대로 누워) 잠이 들었다. 아침잠을 한참 자고 일어나서 간단히 끼니를 챙겨먹고 다시 거실 리클라이너에 앉았다. 이번 달에 읽고 있는 책은 <인구대역전>이라는 책인데, 인구변동과 세계화가 현재 서구/선진국 경제에 미친 영향에 대해 이야기하며 곧 다시 인플레이션이 올 것이라는 말을 여러 도표와 어려운 말을 동원해서 하는 미국 우파 경제학자의 책이다. 평소라면 읽지 않을 책이지만, 경제 모임에서 함께 읽고 있는데다가 이번 달에는 내가 속한 팀이 발표 준비도 해야해서 더 부지런히 열심히 읽고 있었다. 게다가 월요일인 내일 아침 모임 때 3분 발표도 해야하니 부지런히 읽어야지 하면서 책을 읽었다. 에어컨 바람은 시원하고, 아오리 사과는 맛있고, 책은 어렵지만 클로드의 도움을 받아 읽어내리니 나름 재미있는 것도 같았다.

한창 책을 읽다가 조금 지루해져서 핸드폰을 켰더니 강소팟의 새 에피소드가 올라와 있었다. 이번 에피소드 이름은 "인스타그램 안 하면 정말 망할까?"였다. 며칠 전 뉴스레터를 통해서 본 작은배와 로그아웃아일랜드의 3개월 인스타그램 운영 중단 프로젝트에 대한 이야기였다. 작은배와 강소팟을 처음 알게된 것이 지난 2월 '디지털 세상에서 주인으로 사는 법'이었으니, 이 에피소드가 내 귀에 쏙쏙 들어오는 건 너무 당연한 일이었다. 뉴스레터를 보고 작은배 방명록에 달아둔 댓글이 그새 소개 되어서 또 반갑게 에피소드를 다 듣고 나서, 나도 인스타그램 중단에 동참하고 싶어졌다. 강소팟에서 강단과 소신 두 분이 하는 이야기 한마디 한마디에 너무 공감이 되었기 때문일까, 어쩌면 나는 계속 인스타그램을 하고 싶지 않았는데 그러면 안될 것 같아서 하고 있었던 건 아닐까? 그 마음에 두 분이 '그냥 하기 싫으면, 안해도 돼요' 라고 얘기해주시는 것 같았다.

여느 IT 서비스가 그렇듯 계정을 없애는 방법을 찾는 것은 꽤나 큰 난관이었다. 생각난 김에 페이스북 계정과 인스타그램 계정을 모두 비활성화했다. 지금 다시 그 과정을 반복해보라고 하면 생각이 안날 것 같을 정도로, 정말 이상한 곳에 꽁꽁 숨겨준 계정 비활성화 기능이었지만.. 뭐 어쨌든 계정을 비활성화했다. 하고나니 왠지 마음이 후련하고 가벼워지고 기분이 좋아졌다. 이 프로젝트를 함께하는 로그아웃 아일랜드 홈페이지에 들어가서 을 읽었는데, 또 너무 좋아서 아무래도 동참해야겠어.(그 누구도 동참하자고 하시진 않았지만) 하는 마음이 든 것이다. (로그아웃 통신문 우편 구독도 했다.) 그래서 시작한 인스타그램 안하기 챌린지. 나는 작은배나 로그아웃 아일랜드 분들처럼 구독자에게 닿아야 하는 일을 하는 사람은 아니지만, 과정에서 어떤 걸 느끼게 될지 사실 생각보다 별 일 없을지? 궁금해졌다.

와 인스타그램으로부터 해방되었다! 혼자 시원한 거실에 앉아 즐거워하며 책을 읽고 있었는데, 주하에게 카톡이 왔다. "집이닝~" 하더니 정원님이랑 둘이 우리 집으로 커피를 들고 놀러왔다. 인스타그램도 없애고 이 조용하고 고요한 집에서 혼자 고독에 침잠하려고 했는데, 친구들이 나를 혼자 두지 않는군. 뭐 고마운 일이지. 같이 커피도 마시고, 포도도 나눠먹고, 쿠키도 나눠먹다가 친구들한테 얘기를 했다.

나 : "나 인스타그램 없앴다!"
주하 : "왜?"
나 : "그냥..내가 듣는 팟캐스트가 있는데..작은배..강소팟.."
주하 : "알아 뉴스레터 봤어. 인스타그램 운영 안하시는 프로젝트 하신다고!?"
나 : "맞아맞아. 그래서 나도 같이 안하려고!"
주하 : "왜??"
나 : "그냥...인스타그램 광고도 너무 많고..나 원래 인스타그램 싫어해.."
정원 : "얼마나 됐는데요?"
나 : "님들 오기 전에..방금 전에 계정 비활성화 했어여..(쭈굴)"
주하 : "그래..? 그래..너 스토리 언제 올라오는지 함 보자ㅋㅋㅋㅋ"

우씨.. 다들 내가 곧 인스타그램을 다시 할 거라고 확신하는 눈빛들이었다. 그래 그럴지도 모르지. 광고도 싫고, 별로 궁금하지 않은 이야기들까지 알게 되는 것도 싫다고 했지만, 사실 나만 빼고 사람들이 재미있는 이야기하는게 싫어서, 결국 이렇게 혼자 고립되는 것만 같아서 다시 돌아갈지도 모른다. 그치만, 집에 이렇게 혼자 있어도 친구들이 놀러와서 커피도 마시고 저녁도 먹는 걸. 그리고 이걸 인스타그램 스토리에 올려서 주하와 정원을 태그하지 않아도 그냥 우리가 즐거운 일요일 오후를 보냈다는 것은 사실인걸? 우리가 나눈 대화들은 모두 의미있고 감사한 시간들인걸? 그렇다고 생각했다.

우리의 대화는 다섯시간 동안 이어졌다.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눴지만, 기억에 남는 건 내 친구들의 배우자 기도 빔과 상담샘의 배우자 기도 빔 중 누가 이길 것인가에 대한 이야기ㅋㅋㅋㅋ였다. 기독교에서는 좋은 배우자를 만나라고 배우자 기도라는 것을 드린다는데, 어쩐지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원하는 '민석이의 배우자의 모습'이 전혀 다른 것 같아서 재밌었다. 나는 이쪽에도 저쪽에도 속하지 않고 요상한 경계선에 있는 것 같네. 근데 이건 예전부터 했던 생각이다. 경계선에 서서 항상 이방인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래서 외로웠고 어디든 속할 곳을 찾으면 '드디어 여기군!'이라는 생각을 하며 내 진심을 모두 갖다 바치곤했다. 그런데 배우자기도 싸움 얘기를 듣다가 문득 떠오른 생각은, 어라 나는 이 경계에 서서 어디로든 갈 수 있는 사람이네. 하는 생각이었다. 펜타를 가려다가, 가지 않고 집에 머물고, 미용실에 앉아 4시간 동안 파마를 하고, 야구를 보다가 잠들고, 시원한 물에 몸을 담그며 혼자만의 워터파크를 즐기고, 미국 우파 경제학자의 책을 공부하듯 읽고, 그러다 작은배와 로그아웃아일랜드 분들을 따라 인스타그램을 지우고, 친구들이 놀러와 커피를 마시고 밥을 먹고, 이 모든 3일의 시간이 어디에도 무엇으로도 정의하기 어려운 경계에 있다해도 그냥 나는 내가 원하는 어디로든 가고 있다는 생각. 하나도 정리되지 않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무튼 인스타그램을 지운지 이제 겨우 3일이 되었고, 이 시간을 얼마나 지속할 수 있을지 종종 기록해보려고 한다. "결국 인스타그램을 다시 깔았다."로 시작하는 문장을 쓰게될지, "인스타그램 지운지 한 달이 지났다."로 시작하는 문장을 쓰게될지. 나도 몰라~

#year-2025 #에세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