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minseok.com

일요일 북촌 산책 : 재동, 가회동, 와룡동

지난 일요일에는 오랜만에 빈박을 만났다. 둘이서 본 건, 재작년 어드메쯤에 논현에서 저녁을 먹은 게 마지막 같은데 그새 각자에게 많은 일이 있었고 또 비슷한 일도 많았다. 우리는 땡스오트 안국에서 만나서, 아산프론티어유스 교육을 받던 종로02 버스가 다니는 길을 걸어 가회동 꼭대기까지 걸어 올랐다가, 고려사이버대학교를 지나 중앙중고등학교를 거쳐서 창덕궁을 걸었다. 창덕궁을 한참 걷고, 광화문까지 걸어와서 각자 버스를 타기 위해 안녕- 헤어졌다. 두어 시간 산책길 동안 만보 넘게 걸으면서 많은 대화를 했다. ​ 빈박과 나는 대학시절 함께 아산프론티어유스를 했고, 사회적 기업에서 일하다가, 현재는 IT 분야의 대기업에서 일하고 있다. 클라우드 서비스를 다루는 것도 비슷해서 직무적으로도 나눌 이야기가 많은데, 사실 우리는 내내 같은 얘기를 했다. 어쩌면 항상 이 조직에서 우린 부적응자일 수밖에는 없을까? 우리가 선택한 이 길에서 우리가 겪는 괴로움은 그냥 우리가 견뎌야 하는 일인 걸까? 그러면서도 억울해졌다. “우리가 많은 거 바라는 거 아니잖아. 그냥 일에 의미가 좀 있었으면 좋겠다는 건데!”. 회식 때 그렇게 고기에만 몰두하지 말고, 좀 더 맛있고 건강한 음식을 먹었으면 좋겠다는 건데. 6-7년 전 우리가 종로02 버스를 타고 가회동 꼭대기에서 교육을 받을 때는 당연했던 것들이 지금은 아니라는 게, 그리고 그 선택을 한 게 다른 누구도 아닌 우리라는 게, 씁쓸하게 느껴졌다.

IMG_0900

언제나 맛있는 땡스오트

우리가 진짜 바라는 10년 뒤, 20년 뒤 모습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도 얘기했다. 조직에서의 성공, 업계 탑 찍기, 이런 말들을 꺼내는 순간 둘 다 헛웃음을 지었다. 그런 게 다 무슨 소용이야. 우리가 바라는 건, 자연과 더 가까이 사는 것. 더 건강한 음식을 먹고, 더 건강하게 사는 것. 내가 하는 이야기들을 잘 콘텐츠로 만들어 엮고, 내보이는 것. 그것이 아니겠냐는 이야기를 했다. 각자 조직에서 일한 지 5년이 넘어가기 시작하면서, 이대로 내가 너무 무뎌지거나 너무 거칠어지는 것 아닐까 하는 걱정이 점점 생겨나고 있지만 어쩌면 우리는 5년 전이나 지금이나 같은 사람이니 앞으로 5년 후도 같은 사람이지 않을까 하는 낙관도 품어봤다. ​ 그러면서도 살아남는 자가 강한 자 아니겠냐는 말도 나눴다. 우리처럼 부적응자 같은 친구들이 우리 후배들 중에도 있지 않겠냐면서, 그 후배들을 위해서라도 우리가 잘 견뎌보면 어떻겠냐는 말도 했다. 사실 우리가 지금 쥐고 있는 조직의 안정성, 연봉과 복지, 상식적인 동료들, 이것들은 쉽게 얻을 수 있는 게 아니다. 다른 환경을 겪어봤기에 더더욱 잘 알고 있다. 그러니 그냥 버틴다, 견딘다,는 마음이 아니라 우리 자신을 잘 지켜가며 살아남아보자는 것. ​ 나는 작년 하반기를 운전과 덕질로 가득 채우며 보낸 덕에 조금의 힘이 생겼고, 올해 10일의 근속 휴가도 잘 써볼 계획을 하는 중이다. 빈박도 봄이 다가오면 쉼을 가져갈 수 있는 기회가 생겨서 봄이오기만을 기다리고 있고. 우리 둘 다, 지금 이 시간에 힘을 길러서 20년 뒤에는 우리만의 세계에서 따뜻하게 안전하게 살 수 있기를. 4월이 오면 빈박의 양평 집에 가서 맛난 걸 얻어먹기로 했다. 가을에는 서천 집에도 초대해야지. ​ 같은 길을 먼 데서 나마 같이 걷는 친구가 있어 감사한 일요일 산책이었다.

IMG_0901

#year-2024 #에세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