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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 후 4개월, 짙은 초록으로 자리 잡기

8월 한 달은 인스타그램을 하지 않고 보냈다. 그 마음에 대해서는 언제든 경계에 서서 어디로든 갈 수 있다면 글에도 써두었다. 그리고 9월 14일이 된 오늘, 다시 인스타그램 계정을 활성화했고 인스타그램을 하고 있다. 그러면 인스타그램을 하지 않는 사이에 나는 무슨 생각을 했고 어떤 변화가 있었을까? 조금 더 고립되고 싶다고 생각했다가, 또 한편으로는 고립되고 싶지 않다고도 생각했다. 그러다 인스타그램이 있든 없든, 내가 괴롭든 안괴롭든 별 문제가 아니라고도 생각했다가, 그것 또한 큰 의미를 부여하는 것 같다고도 생각했다. 무슨 소린지.

책을 많이 읽었고, 많이 샀다. <먼저 온 미래>, <인구 대역전>, <비효율의 사랑>을 읽었다. < AI는 인간을 먹고 자란다>, <이세돌, 인생의 수읽기>, <혼모노>, <미래는 오지 않는다>, <사나운 독립>, <정정하는 힘>, <랭던 위너>, <이것이 기술윤리다>, <미묘한 메모의 묘미>, <주해 동초제 고향임 창본 춘향가>를 샀다. 많이도 샀네... 예전에 사두고 읽지 않은 <후설의 현상학>, <도둑맞은 집중력>을 조금 읽었다. 스쿼시를 다시 열심히 하기 시작했다. 9개월 연장도 했고, 주 2-3회 정도는 꾸준히 나가고 있어서 관장님이 '요즘 출석률 좋아~'하며 칭찬도 해주셨다. 롯데콘서트홀과 국립극장에서 공연을 보았다. 국립창극단의 <심청>이 충격적이게 좋았다. 공연이 끝나고 눈물이 멈추지 않아서 신기한 경험을 했다. 잠실 야구장에 두 번 갔고 한 번은 우천취소, 한 번은 역전패를 당했다.

그동안 해보고 싶었던 일들을 해보기도 했다. 기술 철학을 이야기하는 작은 모임을 시작했고, AI 윤리 레터를 쓰는 필진 분과 식사를 하며 여러 관심사로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엔씨 다닐 때 마지막 팀장님이었던 박님, 같은 팀에 있었던 선배님과 오랜만에 만나 식사를 하고 커피를 마셨다. 이런 어른들과 나의 첫 사회생활을 할 수 있었던 것은 큰 행운이었다는 생각을 다시 했다. 7년 동안 쓰던 연재글 <내 자리의 모양을 찾아서>의 에필로그까지 썼다. 2019년에 처음 쓰기 시작한 글을 2025년에 와서 마무리하게 될 줄이야. 어쨌든 마무리 했다는 것이 중요하다. 올해는 참 많은 것을 끝내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그만 둔 것도 있었다. 함께 서천집을 고치는 프로젝트를 해볼까 했던 건축사님과 함께하기 어렵게 되었고, 나는 그 일을 아빠가 처리할 수 있도록 넘겼다. 그리고 마음이 너무 시원해졌다. 언젠가 나와 이 집의 때가 맞는 날이 올 것이고, 지금은 과한 책임감을 짊어질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다. 매일 아침에 하던 경제 커뮤니티 모임도 그만두었다. 넷플릭스에서 웬즈데이를 보다가 생긴 의심과 불신의 씨앗이 점점 커졌고, 더이상 신뢰를 가지고 모임을 하기가 어려워졌다. 여전히 시크릿 노아의 방주를 내 발로 나가는 건 아닌가 하는 두려움이 남아있지만 이미 결정한 것을 물릴 수도 없는 법. 쉬운 길로 가려다가 내 독립성을 다 잃게 되어버릴지도 모른다. 이러나 저러나 잘한 결정이길 바랄 수 밖에.

호기롭게 2주에 한 번씩 쓰겠다고 다짐한 뉴스레터는 두 번 겨우 보내고 멈추었다. 재단 막내 수야가 "테일러 왜 뉴스레터는 안 보내주세요?~"라고 잊을만하면 물어보는데, 그러게요. 그렇게 하기가 쉽지가 않네요. 저도 제가 그걸 할 수 있을 줄 알았거든요? 그래서 다시 부수입도 창출하고, 글도 쓰고, '레코드 애플'로서 브랜딩도 하고요? 근데 못하겠네요. 팔랑팔랑 대는 내가 셀프 브랜딩이라는 걸 잘 할 수 있을리가 없지. 스스로에게 너무 큰 실망은 하지 말기를. 그럴 수도 있지 뭐.

집에서 고요하게 혼자 보내는 시간이 많았다. 이사온지 3개월이 훌쩍 지났는데 이제서야 거실과 침실에 커튼을 달았다. 이케아 화이트 반암막 커튼 사이로 비추는 햇빛이 꽤 따뜻하고 아름다워서 계속 바라만 보고 싶어졌다. 식물 네 개를 새로 들였다. 마지막 남은 민생회복소비쿠폰을 털어서 샀다. 뷰티그린, 스킨답서스, 뱅갈고무나무, 천리향. 이 아이들이 새로 옮긴 화분에서 잘 자라날 수 있도록 매일 잎 상태를 보고, 흙 상태를 지켜봤다. 3주쯤 되었는데, 다행히 새 잎을 피워내고 물도 꿀꺽꿀꺽 잘 먹는거 보면 이사온 집에 자리잡기가 잘 되고 있는 것 같다.

그러게. 이사온 집에 자리잡기가 잘 되고 있는 것 같다. 식물들도 그렇지만 나도 그렇다. 드라마틱한 변화나 새로운 일상의 다이나믹은 없지만 마음이 평온하고 좋다. 아침에는 출발 FM과 함께의 이재후 아나운서 목소리로 하루를 시작하고, 출근해서 일하고 돌아온 뒤에는 야구를 보거나 스쿼시를 치러갔다오고, 가끔 이상협 아나운서의 당신의 밤과 음악을 들으며 하루를 마친다. 주말이나 금요일 저녁에는 친구들이 놀러와서 요리를 해주기도 하고, 또 식물을 돌본다. 조용히 책을 읽고, 쓰고 싶은 글을 생각해보기도 한다. 넷플릭스도 보고, 집안일도 한다. 그저 고요하게 나의 시간을 만들어내고, 단단한 일상을 쌓아나가는 것이 참 좋다는 생각이 든다.

어제 집에 놀러온 친구들과 이야기를 하다 문득 떠오른 건, 나의 지난 3년이 정말 힘든 시간이었다는 거였다. 누군가의 질투, 깎아내림, 과한 책임감, 더운 여름 거리를 배회하던 시간, 과호흡과 공황 상태, 아래로도 위로도 옆으로도 어느 쪽으로도 갈 수 없어 벽을 보고 그저 서있어야 했던 날. 그 시간들이 22년 여름부터 24년 여름까지 쭉 이어졌다. 그리고 지난 1년은 그것을 조금씩 회복하는 일들이었고, 상처가 아문 자리에 새 이파리가 많이 돋았다. 이제는 그 새싹들을 잘 돌보고, 키워내면 될 일. 그만 둔 자리를 돌아보며 미련을 삼키는 건 오늘까지 하는 것으로 하고, 자라난 초록을 짙은 초록으로 더 깊게 만들며 살아봐야지.

#year-20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