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minseok.com

곡우를 지나며

올해 1월 사무실에서 정말 할 일이 없던 때가 있었다. 이제 울만큼 다 울어서 눈물도 나지 않았던 날들. 할 일은 없는데 자리는 버티고 있어야하던 그 때에 유일한 도피처가 불렛 저널이었다. 알라딘에서 받은 불렛 저널에 자꾸 이것 저것을 쓰다가 24절기 에너지 그래프를 만들었다. 24절기에 대한 설명을 모두 적은 후 1년 동안 절기 별로 나의 에너지 상태를 점을 찍어 기록해보기로 했다. ​ 어제는 곡우였다. 곡우는 8번째 절기다. 그러니까 올해의 1/3이 지나간 지점이라고도 볼 수 있겠다. 요즘은 회사에서 불렛 저널로 도망쳐 있을 여유는 없다. 해야할 일이 있고, 하고 싶은 일도 조금씩은 있다. 해보고 싶은 일을 제안하고, 하기도 한다. 옆자리 선배와 의논하며 프로덕트를 만들어가는 것도 흥미롭다. 팀장님은 여러 역할을 동시에 맡으시면서 나를 신경쓸 겨를은 별로 없으시지만, 그런 중에도 신경 써주시려 노력한다. 그러면서도 파티션 너머 웃음 소리가 들릴 때마다 소름 끼쳐서 에어팟을 귀에 밀어 넣는 시간도 함께 존재한다. 누군가의 웃음소리가 가장 큰 괴로움을 준다는 것이 한편으로는 참 슬픈 일이라는 생각도 든다. 하루에 절반 이상을 머무르는 곳에서 들려오는 웃음소리가 나의 가장 큰 괴로움을 자극하는 일이라는 것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안에서 좋은 것들을 찾으며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 모순 같이 느껴지기도 하고, 그냥 어쩔 수 없는 어른의 일인가 싶기도. ​ 어제는 센터에서 변경된 중장기 목표를 공유하는 시간이 있었다. 전략 목표에 포함된 프로젝트를 보니 씁쓸해졌다. 결국 저 프로젝트에 배제되면서 이 모든 것이 시작되었다는 생각에 착잡하기도 하고, 또 한 편으로는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센터의 앞으로의 방향성에 저렇게나 중요한 프로젝트를 맡게 되는게 정말 좋은 일일까? 커리어에도 좋은 일일까? 좋겠지. 중요하지 않은 일하는 것보단 중요한 일 하는 것이 좋지 않겠어? 역시 계속 생각이 이랬다 저랬다 맴돈다. 아니 그런 중요한 일을 하면 휴가도 못 쓰고, 프로젝트의 단위가 커지다보면 어려움도 생길 거고, 뭐 그렇지 않을까. 모르겠다. 하지만 여전히 내가 실력이 부족해서 배제된 것이 아니라, 시도해보지도 못하고, 해볼 기회도 얻지 못하고 그저 밀려나 버렸던 것이 1년이 다 지나가는 지금까지도 억울한가보다. 그 억울함이 남아서, 파티션 너머 저 웃음소리들이 아직도 소름이 돋나보다. ​ 곡우는 촉촉하게 내리는 봄비를 맞으며 새싹이 움트는 절기이다. 자전거를 타고 출퇴근하다보면 요즈음이 1년 중 가장 아름다운 계절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딱 이 시기에만 볼 수 있는 연두색이 가득한 풍경에 눈길이 간다. 회사 자리에 앉아서 괜히 혼자 느끼는 억울함 같은 것들도, 연두색 나무를 보면 조금은 사그러드는 마음도 든다. 지금 내가 회사에서 더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다시 그 프로젝트에 들어갈 수도 없는 일이고. 사실 이제 와서 그렇게 하고 싶은 마음도 들지 않는다. 그저 시도해보지도 못한 것이 억울할 뿐. 억울하면 억울한대로 충분히 억울함을 느끼자. 소름끼치는 웃음소리가 들리면 다른 사람 눈치 보지 말고 자리를 피하거나 귀에 에어팟을 밀어넣자. 언니 말대로 이어플러그를 사야하나. 그리고 밖에서 새로운 기회를 엿볼 수 있도록 계속 준비하자. 아무래도 저 웃음소리들이 아무렇지 않아지는 날이 금방 올 것 같지는 않으니까. ​ 그래도 24절기 에너지 그래프에 곡우는 올해 최고점을 찍었다. 딱 이 정도의 수준을 3개월만 유지해봤으면 좋겠다. 과도하게 신이 나지도, 과도하게 우울하지도 않은 딱 좋은 에너지 레벨의 상태를. 괴로운 건 괴로운대로 인지하고, 또 신나게 울고. 연두색을 마음껏 바라보고, 야구도 재밌게 보고, 글도 열심히 쓰고, 일은 슬렁슬렁하고. 최선을 다하면 죽으니까. 딱 이 정도의 에너지가 좋다.

#year-2023 #에세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