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minseok.com

스트리밍 플랫폼 시대에도 라디오를 듣는 이유

대학 시절 컴퓨터 공학과 수업 내내 배웠던 것은 어떻게 ‘최적화’할 것인가였다. 최단 거리의 시간 복잡도를 찾는 것, 제일 빠른 알고리즘을 찾는 것, 메모리를 어떻게 효율화하고 최적화할 것인가. 어쩌면 다른 기술보다도 IT 기술이 가장 빨리 이 세상을 잠식하고 있는 데에는 돈을 부을수록 더 커지는 자본주의와 Computer Science의 자원의 최적화 속성이 찰떡궁합이기 때문은 아닐까. 하지만 이 기술은 모든 것이 생산성의 논리로 작동하는 건 아니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인간의 삶에는 효율적이지 않아도 되는 분야가 있다는 것을. 그 중 하나가 스트리밍 플랫폼 시대에 라디오로 음악을 듣는 일일지도 모른다. 고등학교 시절, 나는 가장 비효율적인 방식으로 라디오와 음악을 들었다. 디제이 겸 PD가 혼자 진행하는 심야식당이라는 새벽 라디오 프로그램을 즐겨 들었는데, 이 프로그램에서 디제이는 주로 말을 하기보단 음악을 선곡 하는 데 집중했다. 새벽 늦은 시간에 방송되는 프로그램이었던 탓에 매번 라이브로 챙겨듣기는 어려웠다. 나는 다음날 홈페이지에서 선곡표와 함께, 저작권 문제로 앞 15초만 들려주는 다시듣기 파일을 들었다. 우선 15초를 듣고, 좋은 음악이 있으면 선곡표에서 다시 찾아 음원을 다운로드하여 MP3에 넣었다. 그렇게 하나씩 나의 음악 취향을 만들어갔다. 손성제의 ‘비의 비가’ 앨범, 이문세의 ‘기억이란 사랑보다’, 윤상의 ‘악몽’ 같은 음악들이 그때 그렇게 하나씩 추가됐다. 한번은 이 과정을 라디오 사연으로 남긴 적이 있다. 디제이는 어떻게 그렇게 부지런한 행동을 하냐며 대단하다고 했다. 그 비효율적인 과정 덕분에 나는 한 곡 한 곡을 소중히 여기게 되었다.

그 무렵 음악 산업에서는 ‘Stop Dumping Music’ 운동이 일어났다. 2012년경, 음원 정액제와 불공정한 유통 구조로 인해 음악 생산자들이 정당한 대가를 받지 못하는 상황에 항의하는 운동이었다. 저가 혹은 무제한 스트리밍 서비스가 음악의 가치를 떨어뜨린다는 문제 제기였다. 당시는 소리바다, 토렌트 등의 불법 음원 다운로드가 점점 자취를 감추고 멜론, 벅스와 같은 국내 음악 스트리밍 플랫폼들이 점점 영향력을 넓히던 시기였다. 한 곡 한 곡의 음악을 소중히 여겼던 나는 생각했다. 사람들이 CD를 더 많이 들으면, 내가 좋아하는 창작자들의 사정이 나아지지 않을까? 그래서 대학 친구들과 함께 시프리라는 모바일 앱을 만들었다. CD를 인식하면 모바일 앱에 등록되고, CD 플레이어로 듣듯이 부클릿 디자인을 넣어서 들을 수 있는 앱. 아이디어만 있고 실효성은 없었고, 당연히 사람들이 쓸 수 있는 형태는 아니었다. 그 이후로도 나는 음악 스트리밍 플랫폼을 잘 사용하지 않았다. 2020년까지도 아이팟을 썼다. 음원 한 곡 한 곡을 아이팟에 넣어서 들었다. 스트리밍 플랫폼이 음악을 그저 흘려보내는 게 싫었다.

그러다 결국 스트리밍 플랫폼을 쓰기 시작했는데, 지금까지 5년째 사용하고 있는 스포티파이다. 스포티파이를 선택한 이유는 역시나 ‘라디오 기능’이었다. 예전에 잠깐 썼던 벅스에도 라디오 기능이 있었다. 내가 좋아하는 음악을 넣으면 유사한 곡들을 추천해줬다. 하지만 장르 위주로 추천하는 알고리즘의 한계가 있었다. 내가 NCT 노래를 많이 들으면 (같은 KPOP이라고) BTS를 추천해주는 식이었다.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같은 KPOP이라도 NCT와 BTS 사이에는 넓은 강이 있다.. 같은 취향일 수가 없다. 스포티파이는 달랐다. 음원을 특성 데이터로 분류했다. 각 음악마다 Danceability, Acousticness, Valence, Energy, Tempo 등을 구분했다. NCT를 들으면 보아를 추천해주거나, 유사한 분위기의 다른 나라 음악을 추천해주는 식이었다. 장르가 아니라 음악의 특성으로 추천하니, 라디오 기능을 써도 갑자기 어색한 곡이 나와서 끄게 되는 일이 없었다. 스포티파이의 매끈하고 끊김없는 흐름이 좋았다.

지금의 나는 라디오와 스포티파이를 동시에 듣는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 7시에 시작하는 라디오를 듣기위해 안테나를 조정해 주파수를 맞춘다. 또, 차에 타면 KBS Classic FM을 켠다. 광고 대신 DJ의 따뜻한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7시부터 이재후 아나운서의 ⟨출발 FM과 함께⟩가 방송된다. 다양한 나잇대의 다양한 삶의 이야기를 들으며 출근하다 보면, 괜히 나도 평범하게 사는 사람들의 무리에 잘 끼워져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며칠 전 목요일, 기분이 점점 안 좋아지던 날이었다. 마지막 미팅이 끝나자마자 부랴부랴 주차장으로 내려와 차에 탔다. 차에서는 언제나처럼 클래식 FM이 나오고 있었다. 5시에서 6시에 하는 ⟨FM 풍류마을⟩의 국악이 끝나고, 저녁 6시가 되어 ⟨세상의 모든 음악⟩이 시작됐다. 오프닝 시그널이 들리고 DJ의 오프닝 멘트가 시작될 때쯤, 거짓말처럼 첫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첫 눈은 모든 사람에게 동시에 내리는 건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누군가에겐 어제 첫눈이 다녀갔고, 누군가에겐 지금 첫눈이 내리고 있습니다. 서울 경기 지방에는 지금 첫눈이 내리고 있죠. 함께 맞이한 2025년의 첫눈 이야기가 우리가 오래 나눌 추억이 되면 좋겠습니다.”

뒤이어 미국인 소프라노 바바라 보니가 부른 김효근의 ‘눈’, 영화 러브스토리 삽입곡인 ‘Snow Frolic’이 흘렀다. 예쁘게 내리는 눈을 보며 이 음악들을 가만히 들으니, 안 좋았던 기분도 나아지는 것 같았다. 며칠 전에는 차에서 우연히 KBS 교향악단과 니콜라이 루간스키의 라흐마니노프 실황을 듣게 됐다. 연주가 끝난 후 박수 소리가 길게 이어졌고, 디제이가 현재 롯데콘서트홀에서 하고 있는 실황 연주라고 설명했다. 그 뒤로 니콜라이 루간스키의 앨범을 스포티파이에서 매일 듣는 중이다. 요즘도 클래식 FM을 듣다가 좋은 곡들은 선곡표를 확인해서 스포티파이에 저장한다. 라디오를 듣고, 선곡표를 확인하고, 스포티파이에 저장한다 - 고등학교 때 심야식당 라디오를 듣던 방식과 크게 다르지 않다.

10년 사이 음원 스트리밍 플랫폼의 영향력은 더 강해졌다. 기술은 계속 발전하고, 스포티파이의 알고리즘은 점점 더 완벽해진다. 내 취향을 분석하고 내가 좋아할 만한 곡을 추천하지만, 나는 여전히 라디오를 듣고 선곡표를 찾는다. 좋은 음악을 하는 아티스트의 유튜브를 찾아보기도 하고, 더 좋으면 단독 공연에 다녀오기도 한다. 모든 방면에 기술이 효율을 추구하는 시대에도, 음악을 그저 배경음악 정도로 취급하는 시대에도, 나는 한 곡 한 곡을 소중히 듣고, 창작자를 응원하는 음악 마니아로 살고 싶다. 음악이라는 예술은 효율성이나 생산성으로 표현할 수 없는 다른 가치가 있으니까. 그 어떤 기술도 음악을 들었을 때 그때의 공기와 감정을 다시 불러일으키는 기억을 구현할 수는 없을 것이다. 내 취향에 맞는 곡을 찾았을 때의 희열과 그 음악을 며칠 동안 한 곡 반복하며 듣는 집착을 이해할 수도 없을 것이다. 음원으로만 듣던 곡의 라이브를 들으러 공연장에 갔을 때 온 몸으로 감각되는 황홀감도. 제 아무리 스포티파이가, 유튜브 뮤직이 발전하더라도 절대 구현할 수 없는 일이다. 그래서 오늘도 ‘굳이’ 음악을 찾아 듣기 위해 주파수를 맞추고 라디오를 듣는다.